대만의 첫 여성 총통으로 선출된 차이잉원(蔡英文) 당선자는 한족(漢族)의 일파인 객가인(客家人ㆍ하카족, 커자족)의 후손이다. 객가인은 중원에 살던 한족 중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전란을 피해 광둥(廣東)성과 푸젠(福建)성 등으로 이주한 무리를 일컫는다. 남부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손님이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실리와 신뢰를 중시하는 객가인은 상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 ‘동방의 유태인’으로도 불린다. 아시아 최대 부호인 리카싱(李嘉誠) 홍콩 청쿵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객가인 중에는 정치적 인물도 적잖다. 중국의 국부(國父)인 쑨원(孫文), 개혁 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등이 모두 객가인이다.
차이 당선자를 정계와 인연을 맺어준 이도 같은 객가인인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이다. 리 총통은 1992년 그를 경제부 국제경제조직 고문으로 발탁했다. 대만대 법학과를 나온 차이잉원은 당시 미국 코넬대에서 석사,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 둥우(東吳)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대만정치대 교수를 하면서 경제부 무역조사위원회 위원, 행정원 대륙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지낸 차이잉원은 2000년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이 되면서 학계를 떠났다. 그를 우리나라로 치면 통일부 장관에 임명한 건 민진당 소속의 당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었다. 천수이볜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현 총리) 등 서구와 남미의 여성 정치인 성공에 착안, 차이잉원을 키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잉원은 2004년 민진당 입당으로 본격적인 정치인이 된 뒤 총선에 출마, 입법의원으로 당선됐다. 2006년에는 행정원 부원장(부총리)까지 올랐다.
천수이볜의 후원 아래 탄탄대로만 걷던 차이잉원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2008년이다. 당시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승리하며 8년 간의 민진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후 천 전 총통의 부패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민진당은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게 됐다. 그러나 당의 위기는 그녀에겐 기회였다. 과격한 부패 정치 집단이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민진당은 기성 정치인들 대신 깨끗하고 온건한 인상의 차이잉원을 2008년 새 주석으로 밀었다. 차이 당선자의 한 측근은 “당시엔 정말 아무도 주석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차이잉원은 민진당을 살려냈다. 그는 취임 후 3년간 9번의 선거에서 7차례나 민진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2012년 총통 선거에선 마잉주 현 총통에게 80만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주석에서 물러난 그는 2014년 당원들 요청에 주석으로 복귀한 뒤 그 해 11월 총선에서 또 다시 압승을 거뒀다. 지난해 민진당의 대선 후보자로 지명됐고 드디어 16일 4년 전 패배를 극복하고 대만의 첫 여성 총통 자리를 차지했다.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국민당의 실정과 이에 대한 대만인의 반감에 힘입은 바 크지만 차이잉원만의 개인적 매력도 빠트릴 수 없다. 얌전히 공부만 한 듯한 인상과 안경, 화장 하나 하지 않은 맨 얼굴, 핀 하나도 꼽지 않은 까만 단발머리 등은 차분하면서도 검소하고 청렴하면서도 따뜻한 인상을 풍긴다. 서민과 청년을 대변하는 그는 옷차림도 소박하다. 가장 정치인 답지 않은 정치인의 모습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미혼이니 앞으로 부패할 일도 적다. 그는 총통 선거 유세 마지막 날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할 때조차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속삭이듯 얘기하는데도 조근조근 할 말을 다 하는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귀를 기울이게 한다.
차이잉원은 1956년 8월31일 대만 타이베이(臺北)시에서 남부 핑둥(屛東)현 팡산(枋山)향이 고향인 아버지 차이제성(蔡潔生)과 어머니 장진펑(張金鳳)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4번째 부인(일각에선 5번째 부인 주장)으로 알려졌다. 할머니는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排灣)족으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18세 때 일본군 징집을 피해 중국 동북지방으로 갔다 2차 대전 후 대만으로 돌아와 자동차 정비 공장으로 성공했고 부동산과 건설, 호텔 사업으로 큰 부를 이뤘다는 게 대만 매체들 보도다. 차이잉원은 2011년 12월 중앙선거위원회에 토지 4필지와 건물 2채, 예금 1,800만 대만달러(약 6억5,000만원)을 신고했다. 원래 이름은 차이잉원(蔡瀛文)이었지만 ‘瀛’자의 획수가 너무 많아 ‘英’으로 바뀌었다. 한 때 동성애자라는 의혹까지 받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사귀던 사람이 교통사고로 숨진 뒤 연애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차이 당선자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하는 일도 많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에 힘입은 바 큰 반면 차이잉원은 그런 배경이 없었다. 정치적 성향도 박 대통령이 보수로 평가받는 반면 차이 당선자는 진보다. 일각에선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하단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정작 차이잉원 본인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본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베이=박일근특파원 ikpark@hankookilbo.com
▦차이잉원(자료:민진당 홈페이지와 대만 매체 등 종합)
약력
1956년8월31일 타이베이시 출생
1978년 국립대만대학 법학과 졸업
1980년 미국 코넬대학 법학 석사
1984년 영국 런던정경대학 법학 박사
1984~2000년 국립정치대학 동우(東吳)대학 교수
2000~2004년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
2005~2006년 입법의원
2006~2007년 행정원 부원장
2008~2012년 민진당 주석
2012년 총통 선거 패배, 주석 사퇴
2014년 민진당 주석
2016년 총통 당선
결혼 미혼
혈액형 O형
종교 기독교
민족 한족 객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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