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활동을 중단하고 제 잘못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7세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카메라 앞에서 자국 국기를 흔들었다는 이유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周子瑜·17)가 정치색 논란으로 궁지에 몰렸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가 예상보다 강도 높은 사과 영상을 공개했지만, 대만의 눈총까지 받는 결과만 초래했다. 국내 팬들은 그들대로 뿔이 났다. 어린 소녀를 심판대에 세운 소속사의 처세가 탐탁지 않다는 거다.
이른바 ‘쯔위 논란’이 수습하려 할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갓 데뷔해 도약의 꿈을 꿀 시기, 그는 어쩌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됐을까. 시작은 무심결에 한 행동에서 비롯됐다.
1. 국기 흔든 게 중죄? 中, 왜 과민반응했나
쯔위는 지난해 11월 멤버들과 함께 MBC 예능 '마이리틀텔레비젼'(이하 '마리텔')에 출연했다. 제작진이 준비한 소품을 들고 방송을 진행했는데, 쯔위에겐 대만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와 태극기가 쥐어졌다. 당시엔 쯔위가 나고 자란 대만의 국기를 드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송을 본 중국 가수 황안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촉발됐다.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들어 '대만 독립 분자'를 부추겼다는 논리다.
중국의 이 같은 반응엔 오랫동안 묵혀온 역사적 문제가 얽혀있다. 중국은 1949년 국민당의 중화민국과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됐다.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臺北)로 옮겼고, 그 사이 중국 본토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중국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하면서 생긴 양안관계(중국과 대만 관계)의 갈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은 1992년 한중 수교를 맺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면서 대만과 국교가 단절됐다. 하지만 다음해 비공식적으로 주 타이베이 한국 대표부가 설립되면서 양국 관계가 회복됐다.
2. 중국 '쯔위 죽이기'…대만은 정치권에도 영향
쯔위 논란으로 중국 내 JYP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다. 웨이보에 'JYP 보이콧'이 검색 키워드로 등장하는데 이어 반한류 분위기까지 감지되고 있다. 쯔위가 사과 영상을 공개한 직후 중국 배우 임경신도 '쯔위 죽이기'에 가세했다. 그는 자신의 웨이보에 JYP 공식 웨이보를 공유하며 "사과가 너무 갑작스러워 (쯔위가) 대본을 외울 시간도 없었다"고 조롱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황안은 되레 곤경에 처했다. 과거 한 방송에서 황안이 대만 국기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포착된 것. 그의 이중적인 행동에 중국에서도 황안에 대한 여론이 악화됐다. 대만에서는 반(反) 황안 정서가 확산됐다. 일부 대만 네티즌은 오는 24일 대만 타이베이 시청에서 황안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기로 하고 참가자 모집에 나섰다. 황안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다음달 3일 대만에서 이번 사태의 전말과 당시 상황을 해명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대만에서는 쯔위 사태가 총통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반중 성향의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총통으로 당선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대만 양안정책협회의 온라인조사 결과 대만 청년층 134만명이 쯔위 사태에 영향을 받아 투표를 결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차이잉원은 당선 소감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직접 쯔위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중화민국 국민이 국기를 흔드는 것은 억압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쯔위 사건은 대만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책무라는 것을 영원히 일깨워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3. JYP, 행사 취소 수난…디도스 공격까지
JYP가 사태 진화에 실패하면서 트와이스는 중국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JYP 소속가수 2PM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2PM 닉쿤은 15일 중국 무한 중앙문화지구에서 진행되는 한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됐다. 2PM도 20일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한국관광의해 개막식 행사 참석이 취소됐다.
JYP가 쯔위 영상을 공개, 중국에 사과하자 대만도 발끈했다. JYP 공식 홈페이지는 17일부터 지금까지 디도스 공격으로 다운된 상태다. 쯔위를 내세운 사과에 반감을 가진 해킹 조직 어나니머스 대만 지부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대만 인권변호사 왕커푸(王可富)등은 18일 JYP가 쯔위에게 사과하도록 핍박했다며 강제죄 혐의로 타이베이 지방법원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한편 쯔위를 내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했던 LG유플러스는 중국의 반한 감정을 우려해 열흘 만에 광고 방송을 중단하기도 했다.
4. '진퇴양난' JYP, 미흡했던 사과의 기술
일련의 사태에서 JYP는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였다. 1차 사과 공문에서 JYP는 "JYP는 문화 기업으로서 정치적 성향이나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 쯔위도 아직 미성년자로,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며 쯔위의 중국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 여론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문화와 정치는 별개'라는 기존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쯔위의 사과 영상을 공개하는 초유의 방법을 동원했다. 쯔위는 영상에서 "중국은 하나 밖에 없으며 전 제가 중국인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국내 네티즌은 JYP가 불필요한 사과를 강행했다고 보고 있다. 양안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쯔위의 행동이 이 정도로 저자세로 사과할 일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중국 시장의 타격을 우려한 JYP가 성급하게 어린 가수를 희생시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쯔위에게 대만 국기를 쥐어줬을 '마리텔' 제작진의 침묵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국과 대만의 민심을 달래는 게 숙제라지만, JYP가 소속 가수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어른들의 정치싸움에 희생된 쯔위가 결국 어른의 잣대로 가혹한 사과를 올렸다. 국내 활동을 재개한 18일 MBC '아이돌스타 육상 대회' 녹화장에서는 대만 방송사 취재진에 의해 몰래 촬영 당하는 수난까지 겪었다. JYP가 쯔위의 사과에 대해 자의인지 타의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지 돌아봐야 할 때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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