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미국 중서부 곡창지대 인디애나 주 팔미라의 한 농가. 두 아이의 아빠지만 아직 20대 농부인 크리스 존스가 집을 나선다. 인디애나 주의 명문 퍼듀대 출신이지만 또래 친구와는 달리 고향의 가족 농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다.
집 앞에 세워진 농기계 콤바인에 오른 존스 앞에는 마치 비행기 조종사 좌석처럼 복잡한 운전석이 펼쳐져 있다. 운전대 좌우와 아래로 모니터 여러 대가 달려 있고, 충전기와 무선통신용 중계기를 연결하는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시동을 걸자 파종 모니터가 깜박이며 토질과 토양의 수분 함량을 측정한다. 곧바로 최적 깊이로 옥수수 씨앗을 심도록 파종기를 조절하고 감시한다. 씨앗이 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모니터에는 토양의 비옥도 정보가 실시간 제공된다.
파종 후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자, 화면에 존스가 소유한 6,000에이커(24만㎡) 농장이 담긴 구글 지도가 나타난다. 화면 한 구석에 날씨 정보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가운데 파종한 옥수수 품종 번호를 입력하자, 예상 수확일자와 수확량은 물론이고 톤당 가격까지 제공된다. 존스가 설치한 농업용 ‘클라이밋 프로’ (Climate Pro) 시스템이 ▦이 지역의 30년 기후 ▦토질과 토양의 수분함량 ▦파종된 종자의 특성을 ‘빅 데이터’관리 방식으로 즉석에서 분석해 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그램을 제공한 ‘클라이밋 코퍼레이션’에 에이커당 15달러 이용료를 내지만 시스템 덕분에 에이커당 수익이 100달러나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이거(농업 시스템) 없으면 농사를 못할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팔미라 농장 사례가 보여주듯 미국 농촌에 농업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바꿀 제3의 혁명, 즉 ‘처방(Prescription) 농법’바람이 불고 있다. 1960년대 1차 녹색혁명은 관개시설 확충ㆍ화학비료 공급확대와 품종개량 덕분이었고, 90년대 2차 혁명이 유전자 변형(GMO) 혁명이었다면 최근 시작된 3차 혁명은 고도로 발달된 첨단 정보기술(IT)이 바탕이다. 농기계와 농경지 이곳 저곳에 센서를 최대한 장착하고 이들이 쏟아내는 방대한 자료를 ‘빅 데이터’기법으로 분석, 해당 지역에 최적 농법을 처방하는 방식이다. ‘클라이밋 프로’ 시스템 정밀도가 가로ㆍ세로 10m(100㎡)에 달하는 걸 감안하면 팔미라 농장 6,000에이커는 구역을 2,400분의1로 세분화한 맞춤 관리를 받고 있는 셈이다.
처방 농법은 농부들에게 토양정보, 일기예보는 물론 곡물 시세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토양 상태, 작물의 생장 상황, 일기예보, 심지어 지난 수십 년 간의 기후변화 도표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몬산토 같은 다국적 종자 회사는 지난 수 십년간 종자 개량을 위해 다수 품종을 재배하며 축적한 자료까지 제공한다.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처방 농법의 성과는 놀랄 만하다. 미 국무부 과학자문관인 라즈 코슬라 박사는 “IT기술을 접목한 농법을 일부분만 채용하더라도 물 사용량을 50%나 줄이면서도 수확량은 15% 이상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농장연합회(AFBF)도 “일부 과정에서 빅 데이터 도움을 받을 경우 비용은 15% 줄어들고 생산량은 13% 가량 늘어나는 결과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몬산토에 따르면 농부는 곡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작물 선택, 파종 시기, 시비량 조절 등 40가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한 두 가지만 정확하게 이뤄지면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처방 농업이 미국 전역에서 전면 실시될 경우의 파급 효과 예상치는 천문학적 규모다. 몬산토 관계자는 “미국 옥수수 농가의 에이커 당 생산량은 160부셸(4,352㎏)에서 200부셸(5,440㎏) 수준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곡물의 최적 생산으로 추가되는 부가가치도 연간 200억달러(24조원)에 달한다는 추정이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체질적으로 변화를 꺼려하는 미국 농민들 사이에서도 빅 데이터를 이용한 처방 농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전체 농민의 60%가량이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한 두 가지 종류의 데이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운행되는 농업용 트랙터의 80%에 데이터 송수신 장치가 장착됐다.
2013년 몬산토가 9억3,000만달러(1조원)를 들여 인수한 뒤 처방 농법의 선두 기업으로 떠오른 클라이밋 코퍼레이션의 이용자도 급증하고 있다. 데이브 프리드버그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몬산토 인수 이전 이 회사 서비스를 이용한 농지는 1,000만 에이커로 미국 전체 농지(1억6,100만 에이커)의 16분의1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5년에는 6,000만 에이커로 전체 농지의 3분의1로 늘어났다.
일부에서는 빅 데이터 기술의 농업 분야 응용에 우려를 보내고 있다. 남한 면적(9.9만㎢)의 6.5배에 달하는 미 전역 1억6,000만 에이커(64.7만㎢) 농지에 첨단 센서를 설치하고 여기서 쏟아지는 자료(에이커당 1기가바이트)를 실시간 분석하려면 막대한 자본 투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새로운 농업 혁명은 몬산토(종자), 존 디어(농업장비), 듀폰(농자재ㆍ비료) 등 대기업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기존 주력 업종은 제쳐놓고, 농업관련 데이터 처리업체로 자처하며 농업 정보망 구축에 매달리고 있다. 몬산토는 클라이밋 코퍼레이션을 바탕으로 ‘필드 스크립트’라는 정보망을 개발했고, 듀폰도 인공위성 위치정보와 기상정보를 결합시킨 ‘프로그레시브 파머’라는 시스템으로 맞불을 놨다.
문제는 대기업이 변화를 주도하면서 개별 농민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일부 농민단체는 “처방 농법을 핑계로 실시간으로 제공된 정보가 대기업에게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전역의 곡물별ㆍ시기별 예상 수확정보를 보유한 곡물 기업이 이를 토대로 시장에서 가격을 조작한다면 생산량은 늘어도 가격 하락에 따른 손해는 농민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소작인은 “대기업에게 제공된 수확량 자료가 지주들에게 전달돼 임대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새로운 움직임에 저항하고 있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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