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가 주축이 돼서 진행하는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이 ‘관제 서명쇼’ 논란을 낳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명에 참여한 이후 기다렸다는 듯 20일 국무총리, 장관들이 줄줄이 참여했고 대기업 사장들도 잇따라 나섰다.
대한상의에서 시작한 서명운동은 전세계적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살아날 수있도록 국회가 서비스산업발전법,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 등 경제활성화 법안을 통과시켜달라는 일종의 청원운동이다.
하지만 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주로 선택하는 서명운동에 유례없이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이 참여하며 사태가 커졌다. “오죽하면 국민이 나서겠느냐”며 대통령이 앞장선 뒤 황교안 국무총리가 이날 모바일로 서명에 참여했고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동참했다.
재계에서는 이날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들이 일제히 서명을 했다. 매주 수요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리는 수요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나온 계열사 사장들은 1층 로비에 마련된 부스에서 서명에 참가했다.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경제활성화법) 입법이 되지 않으면 전세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만 뒤처질 것 같다"며 “지금 전세계 경제는 정책 변수로 움직이는 게 대부분인데 우리나라도 리더들이 이런 활동을 해주고 입법이 잘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서명했다”고 말했다.
삼성이 물꼬를 텄으니 현대자동차, SK, LG 등 주요 대기업들도 서명 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 사장단이 상징적으로 서명에 참여했으니 다른 기업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라며 “조만간 주요 기업들 임직원들이 서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 그치지 않고 민간단체까지 서명을 받겠다고 강추위 속에 거리로 나섰다. 바른사회시민회의, 한국지속가능기업연구회, 시대정신, 한반도선진화재단 등 보수성향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민생경제살리기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서울 중구 정동, 여의도역 근처에서 거리 서명을 받았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날씨가 추워 짧게 서명을 진행했는데 두 곳에서 수십명 가량 서명했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측에 따르면 이날 오전까지 6만여명이 온라인으로 서명에 동참했으며 지난주 말 기준 오프라인 서명 참가자는 8,000명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출발은 경제단체에서 시작했으나 대통령, 장관들, 기업과 민간단체로 서명이 물 흐르듯 확대되자 야당과 진보단체, 일부 네티즌들은 ‘관제 서명쇼’, ‘선동정치’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 맞서 대한노인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 단체들까지 가세하면서 서명 운동은 ‘정치대결’로 흐르는 양상이다.
특히 일부 기업들이 임직원에게 서명 참여를 독려하면서 ‘관제 서명쇼’ 논란이 더 확산되고 있다. 손해보험협회가 각 보험사에 보낸 ‘서명운동 관련 협조요청’ 공문에 소속 회사 임직원 뿐 아니라 독립사업자 격인 보험설계사들까지 서명 대상으로 명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한상의가 경제단체에 보낸 협조 공문에도 ‘해당 기관에서 주관하는 행사, 교육, 세미나 참석자 등 방문객들’까지 서명 대상으로 명시됐다. 해당 기업 직원들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강제로 직원들 서명 받고 이게 국민의 뜻이라고 할 수 있냐”며 서명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잇따라 올리고 있다.
지난해 박 대통령이 청년고용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청년희망펀드’ 조성을 제안하고 1호 가입자가 된 뒤 재계가 그룹 규모별로 펀드 기부액을 내놓으며 일사불란하게 뒤를 따랐을 때에도 같은 논란이 일었다. 이번 서명 운동도 대한상의 내부에서 관련 전담팀이 급작스럽게 조성되고 박 대통령이 서명에 동참하면서 청년희망펀드의 재판이 아니냐는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대통령까지 나선 마당에 가만 있을 수 없게 됐다”며 “진의가 어떻든 최고통수권자까지 나서서 모두가 움직이게 됐다면 다분히 정치적 논란을 낳을 수 있고 그만큼 기업이나 단체들에게 부담일 수 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ankookilbo.com
최문선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