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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받지 않은 ‘강철 풍경’ 찍는 철의 예술가

입력
2016.01.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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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노동자 출신 사진작가 조춘만씨.
철의 노동자 출신 사진작가 조춘만씨.

조춘만은 한국에서 유일한 산업사진가다. 그것도 자본과 국가의 선전물에 고용되지 않은 독보적인 사진 독학자다. 소위 ‘산업사진가’라고 하면 산업체에서 돈을 받고 홍보용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산업경관을 위촉 받은 일거리로 다룬다. 그저 회사소개용 브로셔에 들어갈 공장 전경만 찍으면 된다.

그런 사진에는 산업경관에 대해 궁금해 하고 더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산업체에서도 외부에서 자신들을 들여다보는 걸 극도로 꺼린다. 하지만 조춘만이 쫓는 강철 풍경은 산업체의 주문서가 아니라 ‘나’의 권리와 취향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국가 발전의 사명감에 치여 잃어버렸던 시선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조춘만 2015년작 '조선소'.
조춘만 2015년작 '조선소'.

조춘만은 산업사진이라는 것을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에 산업사진이라는 분야도 없을뿐더러, 가르치고 배울 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산업경관을 보는 시선을 그는 독자적으로 익힌 것이다. 그는 사실 사진 자체를 스스로 배웠다. 그렇다고 그가 돈이 많고 시간이 많아서 사진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55년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달성군에서 태어난 조춘만의 집은 꽤 가난했다.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산에 나무 하고 꼴 베러 다녀야 했다. 그는 이 일 저 일 하다가 42살이나 돼서야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은 해에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그 사이에 그는 무슨 일을 한 걸까.

1974년에 현대중공업 선체 건조부에 입사한 그는 용접사로 선체 조립하는 일을 했다. 조춘만이 농사를 버리고 공업을 택한 것은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한 과정의 축소판이었다. 1978년에는 포항제철 3고로 건설현장에서 배관용접을 했다. 198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건설 현장에서 또 2년을 배관용접 일을 했다. 1982년에는 현대건설 쿠웨이트 서도하 발전소 현장에서 1년을 배관용접을 한다. 그 뜨거운 사막에서 1년에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중공업 의장생산부에서 일했다.

늦깎이 사진학도가 만난 ‘철의 대성당’

그는 파이프라인과 볼 탱크, 뼈대를 이루는 H빔 등을 통해 산업의 괴물들을 다양하게 만났다. 그 괴물들은 조춘만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는 괴물에게 물리기도 했다. 용접 때 불똥이 튀어서 옷에 구멍이 나는 일은 흔했으며, 불똥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가 고막을 태우는 바람에 지금 청력에 약간 이상이 있다. 물론 산업의 괴물에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제 와서 그런 괴물들을 그가 사진 찍는다는 것은 괴물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일이다. 당시 그는 사진에 대해 알지도 못했으나 젊은 시절 산업에 몸 바치는 동안 괴물의 무서움뿐 아니라 매력도 같이 느꼈다.

조춘만 2014년작 '석유화학공장'.
조춘만 2014년작 '석유화학공장'.

조춘만이 처음부터 산업사진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진에 눈 뜬 것은 울산 지역 온산공단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때의 주제는 ‘개발’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때만 해도 산업사진가 조춘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개발지역의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소재 겸 주제는 이미 남들이 다 해놓은 것이었다.

그가 산업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현대중공업에서 용접사로 일하던 경험을 떠올리고 나서의 일이다. 산업경관을 가지고 ‘Townscape’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연 것이 2002년, 경일대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한 것이 그의 나이 48세이던 2003년이었다. 학생으로는 한참 늦깎이였으나 그때 조춘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산업경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19살 때부터 시작한 중공업에서의 힘든 노동이 그의 산업사진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산업체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조춘만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장소를 골라 그림이 될 만한 곳에서 찍는다. 그는 아마 울산 시내에서 중공업 공장이 보이는 산이며 아파트는 다 올라가 봤을 것이다.

노동자로서, 사진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봐준 것은 프랑스 극단 ‘오스모시스’였다. 그들은 철을 주제로 하는 공연 ‘철의 대성당’을 몇 년째 순회공연하고 있는데, 조선업과 중공업이 발달한 한국의 용접사를 찾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조춘만을 만난 오스모시스 극단은 바로 그와 결합하여 프랑스의 샬롱, 독일 자르브뤼켄, 룩셈부르크, 코소보의 코소보 프리슈티나 등 유럽 여러 군데에서 공연을 했다. 중학교도 못 나온 가난한 농부였던 조춘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산업사진가가 되고 나아가 프랑스 극단과 공연을 같이 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된 것은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다.

조춘만 2014년작 '석유화학공장'.
조춘만 2014년작 '석유화학공장'.

‘나’의 권리와 취향으로 본 중공업 경관

조춘만이 그렇게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열중하고 있는 산업사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1970년대에 ‘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인생이 불우한 것으로 여겼다. 전태일이 노동 조건의 개선을 바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청계천에서 분신한 것이 1970년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장은 그저 돈 벌러 가는 곳, 그 풍경은 너무나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이거나, 그저 삭막하기 때문에 찬찬히 쳐다볼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서 산업경관의 표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기업연감’(annual report)이라는 것이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연감에는 산업시설의 사진이 실리지만 이것도 제대로 된 산업 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업연감에서 중요한 것은 통계수치이지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산업경관을 담고 있는 사진은 참고도판일 뿐이다. 사진의 구도는 항상 공장의 전경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손에는 설계도를 든 직원이 손으로 멀리 하늘을 가리키는 상투적인 것들뿐이었다. 그 사진들은 엄밀히 말해 산업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자본의 프로파간다였다.

1970년대의 산업 표상이 국가의 프로파간다였다면 1990년대의 기업연감 사진은 자본의 프로파간다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사진들은 여전히 상투적이고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근대화를 위해 산업이라는 괴물을 끼고 살아야 했지만 그것을 표상으로 만들어서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중심적인 가치는 ‘애호’이다. 국가에 중요하거나 근대화의 상징이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눈에 저 경관이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사소해 보인다. 국가나 근대화가 작은 개인인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나 근대화는 개인의 애호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구국의 사명감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근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나’가 희생되었는가. 희생된 것은 ‘나’의 목숨만이 아니라 ‘나’의 권리와 취향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조춘만은 국가 발전의 사명감에 치여 잃어버렸던 ‘애호’ 즉 자신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시선을 찾아 나선다.

역사 기록하는 개인의 열정이 소중

중공업의 경관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산업체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들은 경관에 관심 없고, 거기서 일 하는 사람도 바빠서 경관에 관심이 없다. 조춘만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중공업의 경관을 애호를 통해 선택하고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전환이다.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의 시선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중공업의 경관을 이제야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21세기 산업의 현재를 성찰하기 위해선 지나온 과거에 대한 참고자료가 필요하다. 그때 가면 조춘만의 사진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바뀌고 허물어지는 우리의 역사시간 속에서는 어떤 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록은 먼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 초기 근대의 역사적 자료를 찾기 위해 일제가 남긴 자료를 뒤져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보자. 당시 조선은 신통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와서 식민지 지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결핍의 역사가 언제까지 반복돼야 하는 걸까? 조춘만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산업미에 대해서만은 기록의 역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조춘만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이루어냈다. 그의 스승은 어릴 적부터 체득한 고된 산업노동과 사진의 시선뿐이다. 그래서 조춘만이 독보적인 사진가가 된 것이다.

이영준 기계비평가ㆍ계원예대 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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