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마지막 날부터 항공기 결항 사태
공항카트 쟁탈전…정류장은 아수라장
온수 못 구해 컵라면 부숴 먹기도
재난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현실로
25일 오후 첫 비행기 떴지만 전쟁은 계속
‘환상의 섬’제주도에서 환장할 일이 벌어졌다. 계획대로라면 기자는 휴가의 마지막 날인 23일 오후 1시 25분 제주항공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하지만 제주지역에 폭설과 강풍이 지속되며 결국 이 곳에서 강제 2박을 하게 됐다. 악몽 같았던 ‘2박 3일’을 기록했다.
“어떻게든 공항을 빠져나가야 해”
결항 사태 첫날인 23일 결항이 속출하자 공항 카운터는 승객들의 문의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이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사용자 폭주로 휴대전화는 한동안 먹통이었고, 곳곳에선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충전을 위해 콘센트 점령이 시작됐다. 의자의 대체재로 활용할 공항 카트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도 벌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바닥에 깔 대형 박스를 공수하는 등 장기전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댈 자리를 찾아나선 체류자들로 인해 제주공항의 벽면에는 거대한 인간 띠가 형성되기도 했다.
오후 6시가 지나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허기를 달래려고 공항 내 편의점을 찾았지만 초토화 된 상태였다. 도시락, 컵라면, 즉석밥, 삼각김밥, 샌드위치 등이 있어야 할 식료품 코너 매대는 진작에 텅텅 비었고, 과자와 음료수는 사재기 행렬 앞에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칫솔, 치약, 여성용품, 면도기 등 생활용품도 씨가 말랐다. 3층의 도너츠 전문점으로 뛰어가보니 그곳에도 내 몫은 단 한 개조차 없었다. 해가 떨어지자 공항에 생수 수십 박스가 조달됐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공항 관계자는 “한 명당 1개씩”이라고 외치며 나눠줬지만, 일부 사람들은 ‘한 손당 1개씩’, 혹은 그 이상으로 챙기기도 했다. 다행히 생수 한 모금은 들이킬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사람들은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항에 갇혀 멍 때리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간 오늘 밤을, 아니 어쩌면 며칠밤을 공항 노숙인으로 지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후 7시. 공항 벽을 따라 인간띠를 이루던 사람들은 버스와 택시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버스정류장은 포화상태였고, 택시정류장엔 100m 넘게 늘어선 사람들만 와글거릴 뿐 택시는 안 보였다. 택시 대기 줄 맨 앞에 기다리던 사람은 공항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2시간째 추위와 사투 중이었다.
공항 내 정류장으로 버스가 한 대 들어오자 어림잡아 수백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 아수라장에서 외마디 비명들이 터져 나왔고, 누군가는 “어딜 가든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터질 듯이 승객을 태운 버스는 눈길을 위태위태 헤쳐 나갔다. 결국 기자는 도보 이동을 택했다. 영화 '히말라야'에서나 볼 법한 눈보라를 헤치며 50분을 걸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그날 처음 마주한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은 박수를 쳐줬다. 그제서야 그날의 첫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기자양반, 이것 좀 먹고 해~”감동의 동지애
24일 일요일 비행기는 모두 예약이 차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밤사이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수시로 새로고침 해가며 날짜별로 예매해 놓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공항을 향했다. 택시 기사는 “오늘 제주도 택시의 10%도 운행을 안 한다”며 “젊은 기사들이라도 움직이자고 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행운이었다. 공항에서도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했다.
헛된 생각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23일 상황의 재탕이었다. 한 청년은 뜨거운 물을 못 구해 컵라면을 부숴 먹고 있었다. 공항의 모든 카트는 의자로 변신했다. 대기번호를 받기 위한 행렬은 끝이 없었고, 꼬박 밤을 샜다는 한 항공사 직원은 24일 오전에도 쉰 목으로 결항 승객들의 분노를 달랬다.
오후에 접어들자 공항 분위기는 한층 차분해졌다. 25일 오전 9시까지 예정된 항공편이 결항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속속 인근 찜질방이나 제주시 외곽의 숙소를 잡아 이동하는 관광객들이 늘었다. 공항에 남은 사람들은 잔잔한 동지애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 쟁여 둔 간식을 나눠 먹는 훈훈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 아주머니는 기자에게도 “하나 먹어가며 일하라”며 제주 특산품인 감귤 초콜릿을 쥐어줬다.
때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 12시경 숙소에 들어서자 남성 6명이 함께 쓰는 게스트하우스 안은 코 고는 소리로 가득했다. 선잠 끝에 ‘차라리 공항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새벽 4시 30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번엔 동파 사고가 충격을 안겨줬다. 샤워기를 아무리 틀어 놓아도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차디찬 물로 세수와 양치질만 한 채 숙소를 나서 편의점을 향했다. 눈을 반짝이며 컵라면을 뜯었지만 그곳엔 아예 물이 없다고 했다. 이미 뜯은 컵라면이 아까워 몇 입 베어 물었다. 더 먹었다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내려 놓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늘 갈 수 있다”며 눈물…그녀의 사연
25일 다시 찾은 공항의 새벽은 난민촌 그 자체였다. 모두가 그곳에서의 생존 방법을 익혀가고 있는 듯 했다. 박스로 지은 집은 기본이었다. 한편엔 여행용 텐트가 등장해 체류객들의 부러움을 샀다. 난간과 가방 위, 심지어 소화기 손잡이에도 빨래가 걸려있었다.
날이 밝자 이 ‘제주 난민촌’에 구원의 손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제주보건소와 에스-중앙병원의 의료봉사 부스는 차려지자마자 긴 줄이 늘어섰다. 극심한 두통에 나도 줄을 서야 할까 싶었지만 어르신들의 행렬에 끼기 죄송스러웠다. 밤사이 공항엔 걸그룹 AOA의 설현이 등장했다. 비록 통신사에서 차린 충전부스에 선 배너 이미지로 만난 설현이었지만 왠지 오늘은 공항 사정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느낌은 맞아떨어졌다. 오후 3시경부터 항공기 이륙이 시작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항공사 카운터는 전쟁터로 변했다. 대부분 항공사는 대기번호를 받은 23일 결항자를 1순위로 수송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주항공과 진에어의 경우 대기번호를 받으라는 안내 받지 못한 승객들이 많아 이곳 저곳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 상황에 해당됐지만 항의는 참았다. 이튿날 항공권을 확보해 놓은 탓도 있지만, 항공사 직원들의 2박 3일을 지켜본 입장에서 그들 앞에 한마디 더 보태봐야 서로의 상처만 덧날 것 같았다.‘어쨌든 가긴 가는구나’ 한 시름 덜었지만 긴급 수송이 시작되더라도 9만 명에 육박하는 체류자들의 수송이 원활이 이뤄질 지도 걱정이었다.
제주공항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친 카페에선 전화 통화 중 “오늘 갈 수 있나봐!”라고 외치며 눈시울을 붉힌 여성을 만났다. 사연을 들어봤다. 하루만 더 제주도의 갇혔다면 그녀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23일부터 사흘째 제주도에 갇혔던 이지현(26)씨는 25일 운항 재개로 서울로 향할 수 있게 되자 "오늘 갈 수 있어 천만 다행"이라며 눈물을 머금었다.
지난해 대학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했던 이씨는 최근 장애인 유도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렵게 얻었다. 하지만 제주도 고립 생활이 길어지며 절망감도 커졌다. 이씨는 “서류제출 마감 기한인 내일(26일)까지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더라면 대표팀 합류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며 “2박 3일 내내 속앓이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날 귀환으로 28일 경기 이천시에서 예정된 2016 리우 장애인올림픽 대표팀 동계 훈련에 무사히 합류 할 수 있게 됐다. 먼저 자리를 뜨는 이씨에게 “리우에서 좋은 소식 전해달라”며 격려의 인사를 전한 뒤 공항을 둘러봤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제주 공항엔 서서히 웃음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후 2시48분 김포행 이스타항공 여객기(B737-700)가 승객 149명을 만석으로 태우고 첫 번째로 이륙하면서 2박 3일에 걸친 제주공항 악몽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아직 공항에 갇혀있다. 수만명의 인파에 한 걸음 옮기기도 힘든 상황. 서울 귀환이 예정된 26일이 또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주=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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