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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진단한 ‘행복하지 못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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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는 신년 기획 시리즈 ‘저성장 시대, 한국인의 행복리포트’를 통해 우리 사회의 행복구조를 진단했다. 한국, 일본, 덴마크, 브라질 4개국 설문조사를 통해 세대와 소득 수준에서 한국의 기형적 행복 지형과 원인을 짚어봤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을 대상으로 한 다국적 빅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는 한국인의 경직되고 협소한 행복관을 확인했다.
한국일보는 지난 21일 유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실장 등 국내의 행복 전문가와 함께 좌담회를 갖고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우리 사회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해봤다.
●최근 학계, 언론에서 행복 논의가 활발하다. 왜 지금 행복이 화두인가.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960년대 이후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총소득(GNI) 같은 소득중심 지표만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논의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꾸준히 제기됐다. 세계 행복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는 유엔(UN) 등에서 GDP에 주관적 웰빙까지 넣어 굉장히 정교한 행복 논의를 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그런 의미에서 전환점을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조사실장 “소득이 어느 정도 올라 가면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행복도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 그 지점에서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사회구조나 시스템이 바뀐다고 바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마음은 가장 늦게 변한다. 몇 백 년 동안 이룰 성장을 50년 동안 압축해서 이뤘는데 선진국과 같을 수 없다. 사고와 문화적인 지연도 고려해야 한다. 단기간에 국민의 행복감을 끌어올릴 방법은 딱히 없다.”
●한국인의 행복 지형을 어떻게 평가하나.
유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서구 선진국은 연령이 높아질 수록 행복도가 떨어졌다 다시 증가하는 U자형이다. 노인들이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어떤 충격이 와도 소화할 수 있는 여유가 커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 관대해진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60대 이상의 행복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빈곤 노인이 많기 때문에 서양처럼 여유를 찾기 힘든 부분도 작용한 탓이다.”
김동열 “노년 층의 경제적 토대 중 가장 중요한 공적연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은 중장년층의 행복감을 깎는다.”
●한국 20대가 행복감은 높은 반면 비관론이 두드러졌다.
김동열 “일본의 20대 행복감이 상당히 낮은데 이 역시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헬조선’ ‘흙수저’ 등 젊은층의 냉소가 깊다. 이대로 가다 보면 일본처럼 젊은이들의 행복감이 현격히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든다.”
이재열 “베이비붐 세대와 그 이전 세대는 바닥에서 출발해 삶의 토대를 일궜다. 일생이 어마어마한 성취 스토리다. 자식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미국의 한 컨설팅 회사에서 분석해 보니 미국 갑부의 80%는 벤처인인데 한국은 상속형이 대부분이었다. 서울대에도 시골 출신이 별로 없다. 상승 채널이 막혔다. 세습에 의해서 자신의 위치가 결정되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 전체적으로 국가, 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유정식 “한국일보 조사에서 젊은층, 고학력, 경쟁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특히 소득 계층에서는 중상층의 부정적 비율이 높다. 직업이나 교육 경쟁을 가장 치열하게 한 사람들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사회의 경쟁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빠르게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 냈지만 압축성장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낙오에 대해 굉장한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한국사회에 희망이 없다고 인식하는 측면이 크다.”
이재열 “모두가 가난하고 평등한 사회에서 시작했다. 상고 출신 대통령이 3명이나 나온 것처럼 과거에는 누구든 뭐든 다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경쟁은 치열한데 떨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 태국이나 브라질처럼 애초에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질투하기보다는 행복을 가족처럼 가까운 데서 찾는다.”
허태균 “사회적 신뢰에 대한 연구를 해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부에 요구하는 신뢰 수준이 부모 이상으로 높다. 또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요소가 다 좋아야 만족한다.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만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하진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도 나가려고 한다. 여기 삶이 너무 고달파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다양성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획일적인 경쟁을 하다 보니 성공을 해도 그 의미를 못 찾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구조가 행복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하는가.
유정식 “시장경제 하에서 승자가 많이 가져 가는 시스템은 선진국이나 우리나 동일하다. 우리 사회는 승자에 대한 인정과 관심이 지나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승자가 되지 않으면 발언권이 없다. 이게 타국과 다른 구조다. 서울대 들어간 학생, 사시를 패스한 고시생, 성공한 CEO, 인기 연예인에 대한 주목도가 과도하게 높다. 경쟁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허태균 “승자에 대한 인정과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결과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 패자를 배려해야 하지만, 과실이 없다면 성과를 내려고 노력할까도 따져 봐야 한다.”
김동열 “쏠림이 심한 경향이 최근 좀 바뀌었다. 셰프들이 방송에서 조명을 받는 등 직업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다양한 만족감을 얻고 있는 선진국처럼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듯 해 낙관하는 측면도 있다.”
●저성장 시대에 국민의 행복 관리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유정식 “소득이나 직업, 지위는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도 크지만 한계효용도 빨리 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국민의 행복 평균을 올리는 일과 행복 수준이 낮은 계층을 염두에 둔 정책은 달라야 한다. 전자를 위해서는 사회적 배려를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후자를 위해서는 빈곤층 보호를 위한 사회 안전망을 보다 체계적으로 갖춰야 한다.”
김동열 “저성장은 세계적 추세로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민이 소득 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정부도 산업예산보다 복지예산을 더 배정하고, 실제로 많이 늘었다. 하지만 고용의 안정성이 현격히 떨어져 문제다. 실업급여 지급기간이 8개월에서 9개월로 늘었다고 박수 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실업급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고용 유연화를 밀어 붙이는 추세다. 사회적으로는 안전망이 너무 소홀하다. 결국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국민들은 반대한다.”
이재열 “투명성과 정교함의 문제로 본다. 국민이 세금을 안 내겠다고 하는 건 그런 요인 때문이다. 스웨덴 같은 경우 소득에서 50%씩 세금으로 떼가도 생애주기에서 언젠가 돌려받기 때문에 큰 저항이 없다. 우리는 투명성이 현격히 떨어진다. GDP는 유럽국가로 하면 1980, 90년대 수준인데 당시 그 사회의 복지나 시민의식 수준은 지금 우리보다 몇 배 높다. 때문에 성장도, 복지도, 민주주의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허태균 “복지가 불행을 막아줄 수는 있지만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돈을 아무도 내지 않으려는 현실 문제도 있지만, 복지는 최소한의 평균을 맞춰주는 개념이지, 행복하게 해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이긴 사람이 더 가지는 게 맞다. 대신 경쟁의 범위를 넓혀 여기서 떨어져도 다른 분야에 가서 성공할 수 있도록 다양성이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보다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한 방안이 있는가.
이재열 “경제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낮게 나오는 곳이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이다.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현세지향적 국가들이다. 사람들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는다. 우리 사회는 ‘3불 사회’다. 과거는 불신하고, 현재는 불만스럽고, 미래는 불안하다는 의미다. 80년대 소득이 5,000달러일 때 국민 80%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했다. 소득 수준이 훨씬 올라간 지금 조사하면 20%도 안 나온다. 계층적 자신감을 다 잃었다. 건전한 자신감을 다 잃어버린 사회가 됐다. 제일 핵심은 공정성,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적 질이 바닥이라는 건 공공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배려 같은 사람들의 태도와 연결된다. 영미권처럼 자발적인 배려 같은 가치가 강조 되어야 한다. 경제가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적인 참여나 신뢰, 즉 사회의 질(social quality)이 행복감에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게 안되다 보니 굉장히 거친 사회가 됐다.”
유정식 “행복과 관련해 경제성장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선진국들의 경우 사회적인 질도 함께 높아졌기 때문이다. 성장 단계에서 공유 시스템도 잘 작동됐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김동열 “공동체에 관한 사회 지표가 50, 60년대 농경 시대와 비교해 어마어마하게 역전됐다. OECD의 삶의 질 측정지수인 ‘보다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같은 사회적 신뢰 항목이 꼴찌수준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변화를 위해 조언할 말씀은.
유정식 “한국사회의 빠른 성장과 민주화는 많은 개도국에 선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기적’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압축성장 문제가 많이 노출되고 있는데, 행복 논의는 한국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크다. 특히 교육 및 취업에서 나타나는 과열된 경쟁을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성이 크다.”
김동열 “핀란드 교육의 특징 중 하나가 낙오자가 없다는 거다. 교사 둘이 있어서 한 명은 수업을 못 따라 가는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래도 안 되면 방과후에 도움을 줘서 낙오되지 않게 한다. 우리는 뭐든지 서열화한다. 그런 격려 문화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팀을 이뤄서 협력하며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경험을 교육부터 적용하면 어떨까 싶다.”
허태균 “어떤 일선 학교를 보면 의복 불량은 벌점 7점인데, 친구를 도와주면 상점이 1점 밖에 되지 않는다. 뒤처진 사람을 배려하도록 교육도 문화도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나가야 하지만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더 가져가는 게 틀렸다는 메시지를 주면 안 된다.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자기가 잘하는 데서 인정을 받고 성장하도록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줘야 한다.”
이재열 “우리는 아는 사람만 확실히 챙기고, 모르는 사람을 배척하는 게 큰 문제다. 사회적 신뢰의 지름이라고 하는데 선진국은 사회적 관계와 배려에서 얕고 넓다. 우리는 그 지름이 굉장히 좁고 깊다. 사회적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그 지름을 넓히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진행=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정리=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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