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준비는 여자만 하라는 게 정부 공식 입장인가요?”
정부가 공식 정책 홍보 블로그에 성 차별적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가 비판이 쏟아지자 사과문을 올리고 글을 삭제했다. 저출산과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우는 정부가 성별 분업을 공고히 하는 구시대적 발상을 버젓이 정부 공식 블로그에 올려놓고도 문제점을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데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정부 공식 정책 홍보 블로그인 ‘정책공감’은 지난달 27일 설 명절을 앞두고 ‘1년차 새댁의 첫 명절 준비, 가족 선물부터 음식준비까지’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이 게시물은 지난해 결혼한 1년차 새댁 김씨의 시점으로 설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설날을 앞두고 양가 부모와 친구 등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를 고민하는 김씨가 하루 종일 리스트를 만들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설 명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 등을 검색하다가 친정 어머니의 조언으로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이용하기로 하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남편은 퇴근 후 선물 고민을 하는 아내에게 사회적기업 제품을 권유하거나 선물 리스트를 검토하고 정보를 주는 조언자 내지 결정권자의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게시물이 올라온 후 블로그에는 “왜 여자 혼자 다 준비하는 거냐”, “여자들도 일하는 가정이 대부분인데 왜 여기선 여자 혼자 뭔가 장만하고 고민하고 있는 거냐” 등 비판적 댓글이 줄을 이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에서도 큰 논란을 빚었다. “이렇게 성차별적인 광고가 정책홍보 트위터에서 나왔다는 게 놀랍다” “비혼 장려정책 홍보인가” “여성 대통령 정권의 성 역할 강화” “정부가 이렇게 가부장적 악습을 장려해도 되나” 등 비난이 폭주했다. “명절과 관련된 모든 단어들이 새댁과 경험 많은 어머니와만 관련되고, 남편이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전혀 안 보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여성을 누군가의 조언에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인 것처럼 그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의 저출산 대책과 연관시켜 비판하는 목소리도 잇따랐다. “한쪽에서는 결혼해서 애 셋씩 낳고 살라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이렇게 대놓고 결혼 혐오를 조장하고, 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앞뒤 안 맞는 정부의 태도를 꼬집었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3일 오후 해당 글을 삭제하고, ‘1년차 부부’의 시점에서 양성평등에 입각해 작성한 글을 새로 올렸다.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과문도 함께 게시했다. “설을 앞두고 설 준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정책·생활정보를 소개하자는 취지로 해당 콘텐츠를 기획하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명절 전 고민하게 되는 '명절 선물 준비' '명절 음식 준비'와 관련한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년차 새댁의 고민'이라는 콘셉트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명절 준비를 마치 여자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새로 수정된 글에서는 “공감씨 부부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던 사회적기업 제품들이 떠올랐습니다”, “설날 선물 구매를 마친 공감씨 부부. 이번에는 함께 설 명절 음식 준비에 나섭니다” 등 신혼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결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결혼 3년차인 회사원 김모씨는 “정부 정책 담당자들이 얼마나 양성평등과 현실세계의 문제에 대해 둔감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빗발치는 비난을 받아야만 잘못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정책적 변화를 기대하겠느냐”고 씁쓸해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