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재개봉 영화 중 관객의 취향을 존중한 영화가 있긴 한 걸까. 지난해 재개봉 영화 24편 중 흥행이라 평가할 만한 영화는 고작 한 두 편에 불과하다. 2월 4일 현재 49만 2,513명의 관객을 동원, 2005년 개봉 당시 성적을 뛰어넘은 ‘이터널 선샤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영화들의 성적은 시원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개봉은 올해도 경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3월까지 확정된 것만 22편에 달한다.
‘재활용’ 열풍이 부는 원인 중 하나는 배급사들의 VOD시장 공략에 있다. 재개봉 영화 대부분은 개봉 당시 삭제된 분량을 덧붙이거나 음질과 화질을 개선한 디지털 리마스터링(digital remastering)을 내세우는데 VOD시장에서 리마스터링 타이틀이 붙으면 ‘몸값’이 뛰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성 보다는 수익성이 우선인 상황에서 관객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은 개봉이 이어지다 보니 성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옥석을 가리는 일은 관객의 몫인 셈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을 만나봤다. 평론가 5인이 영화 팬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할, 과거 단 한 번의 개봉으로는 아까운 영화를 꼽았다.
천국의 문 (Heaven's Gate, 1980, 마이클 치미노 감독)
영화는 189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 도착해 기득권을 가진 농장주들과 뒤늦게 도착한 이민 농부들 사이에서 일어난 학살을 다루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원죄 의식을 담았다. 영화 ‘디어 헌터’(1978)로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했던 감독의 역작이었다. 하지만 야심이 너무 컸던 걸까. 위대한 스펙터클을 만들려는 감독의 과욕 때문에 촬영 기간이 연장되면서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흥행 최고가 아닌 당시 제작비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7시간짜리 영화로 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제작사가 줄줄이 파산할 정도로 흥행에 참패했다. 촬영이 예상보다 3개월 이상 연장되면서 제작비만 4,500만 달러(한화 548억)가 투입됐다. 제작 시기를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명작 영화임은 분명하다. 국내에서는 몇몇 기획전을 통해 공개됐을 뿐 공식 상영된 적이 없어 재개봉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 (1993-1994,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세 가지 장편은 프랑스의 국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인 블루(자유), 화이트(평등), 레드(박애)의 상징을 담았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뒀음은 물론 ‘블루’는 1993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화이트’로는 199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레드’로는 1995년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가상에 지명되는 영예를 누렸다. ‘레드’ 발표와 함께 감독 은퇴를 선언한 그는 시나리오 작가 크지스토프 피에시비츠와 함께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천국’, ‘지옥’, ‘연옥’ 3부작의 시나리오를 쓰던 중 1996년 3월 13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화평론가 김형석
“영화는 감독의 자유, 박애, 사랑의 정신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단순한 쾌감보다는 정신적으로 보양 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감성적인 영화지만 다소 난해할 수도 있다. 올해로 감독 사망 20주기를 맞았다. 유럽의 영화 거장들이 70-80세까지 연출 활동을 하는데 반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너무 빨리 눈을 감았다. 영화를 개봉했을 때만 해도 예술영화 마니아 층이 지금보다 훨씬 두터웠다. 20주기를 맞아 감독이 남긴 흔적을 회고하고, 예술영화의 붐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1991,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영화 ‘세 가지 색’과 거의 동시 촬영됐다. 한 날 한 시에 프랑스와 폴란드라는 서로 다른 공간,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똑같은 모습의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여성은 평범한 듯 하지만 서로 교차하는 삶을 산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음악이다. 미스터리하고 때론 불길하지만 장엄하고 매혹적인 음악은 영화를 완벽하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영상으로 체험해야 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가진 시각적 아름다움은 극장에서만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 삶과 죽음, 운명과 사랑을 심도 있게 다뤄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근본적 윤리에 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삼색 시리즈 ‘블루’, ‘화이트’, ‘레드’ 또한 진흙 속에 묻혀 있기 아까운 영화다.”
※영화 ‘세 가지 색’ 시리즈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5-6월 재개봉 된다.
넘버3 (NO 3, 1997, 송능한 감독)
무대포 정신으로 사는 삼류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주옥 같은 대사와 신랄한 해학, 가차 없는 풍자가 돋보인다. 뚝심의 송강호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가 개봉된 해인 1997년에 열린 청룡영화제에서 송강호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송능한 감독은 각본상과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송강호는 대종상영화제에서도 신인남우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영화평론가 황찬미
“풍자 코미디로서 굉장히 훌륭한 영화다. 삼류 건달과 검사의 이면을 잘 담았다. 특히 ‘내 말에 토..토..토 토 다는 XX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이라고 외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을 더듬던 송강호의 건달 연기는 당시 패러디가 쏟아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아무리 잘났다고 우겨도 결국 삼류인 세상에 대한 풍자로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기에 적절하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 2010, 드니 빌뇌브 감독)
엄마의 유언에 따라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중동으로 여정을 떠나는 쌍둥이 남매 이야기를 담았다. 유언의 내용과 그들의 여정에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이 관객들을 압도한다. 예상치 못한 과감한 스토리 전개와 짜임새 있는 연출력으로 전 세계 평단으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제26회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바르샤바 그랑프리, 제29회 벤쿠버 국제영화제 캐나다 장편상을 수상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추천 제안을 듣고 단박에 떠오른 영화다. ‘캐나다 박찬욱’이라 불리는 드니 빌뇌브 감독 작품으로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는 반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반전이 충격적이면서도 선정적이지 않아 영화에 힘과 무게를 더한다. 원제는 반란의 뜻을 담은 ‘incendies(앵썽디)’로 제목에 표현된 사랑은 없고 가족 역사극에 더 가깝다. 운명이란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수작이다. 예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2011년 개봉 당시 6만8,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현 시점에서 재개봉 한다면 중동국가 분쟁과 맞물려 이슈 메이킹 하기 충분하다.”
윤은정기자 yoon@hankookilbo.com
2016년 재개봉을 앞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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