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한 인생 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남자, 요즘은 행복을 실감한다고 했다. “놀고 먹은 시간이 워낙 많아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연기하는 게 꿈”이었는데 최근 일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이다. 최근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만난 배우 김원해(47)는 일복이 터져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김원해는 영화 ‘히말라야’와 ‘로봇, 소리’, ‘검사외전’ 등 화제작에 잇달아 출연하고 있다.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강력계 형사로도 활약 중이다. 그 와중에 그는 두 달째 주 3회 이상 뮤지컬 ‘오케피’로 무대에도 오르고 있다. 남아나는 체력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강행군이지만 그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면 (섭외가) 들어오는 작품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다”고 말했다.
김원해가 맡은 배역들은 포스터에 등장하지 않는 조연이다. 빈틈 많고 남들의 무시를 받기 일쑤인 이른바 ‘루저’(Loser) 역할이 대부분이다. 그의 최신작 ‘검사외전’에서 그는 교도소에 함께 수감된 검사 변재욱(황정민)에게 “영감님 영감님”하며 알랑대는 동료 수감자로 나온다. ‘시그널’에선 동네 건달들에게 뒷돈을 받다 강등된, 장기미제 전담팀의 형사 김계철로 등장한다. ‘오케피’에서는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감 제로’의 비올라 역이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역할만을 주로 해왔으나 어느 순간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배우가 됐다.
김원해는 “정우성처럼 안 생겨서 (이런 역할들이)가능했다”는 농을 던지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남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들도 세상과 충분히 섞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역할이 아무래도 더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다룬 영화 ‘제보자’(2014)를 예로 들었다. 그는 이 영화 막바지에 심야 택시기사로 잠시 등장해 “에이, 돈 있으면 이민가야지. 이 지랄 같은 대한민국”이란 인상적인 대사를 남겼다. 어지간한 눈썰미의 관객이 아니면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 할 정도의 작은 배역. 그런데도 정작 김원해는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 꼽았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가장 평범한 서민의 입장을 대변한 거예요. 아무리 단역이라도 이런 캐릭터를 만나면 제가 굉장히 행복해져요.”
김원해의 외모는 그리 독특하지 않은데 그가 맡은 역할은 개성이 차고 넘치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얼굴로 섬세한 표현력을 동원해 대중의 눈길을 낚아챈다. 조연배우인 그가 인기를 끌고 있는 비결이다. 형사 당직실에서 목 베개를 하고 앉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김계철 형사를 시청자들이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도 지극히 평범한 얼굴로 보통의 삶을 연기해내는 배우 김원해의 공이 크다.
김원해는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으로 1991년 연극 ‘철부지들’로 데뷔했다. 무대 경력만 25년이다. 비언어극으로 인기를 모은 ‘난타’의 원년 멤버로 10년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다. 함께 공연하던 류승룡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영화계에 먼저 뛰어들고 김원해는 무대에 남은 사연은 이제 영화계의 유명 일화가 됐다.
김원해는 무대에서 울고 웃는 사이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 됐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대형 마트의 정육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김밥 장사를 하며 무대에 등을 졌던 경험을 그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아, 같이 (‘오케피’)공연하는 황정민이 이런 얘기 정말 싫어하는데 큰일”이라며 “연극하는 애들한테 꿈을 줘야지 왜 자꾸 어두운 경험만 말하냐며 엄청 구박한다”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선 이내 “이제라도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원해에게 연기는 멀어질수록 눈물 나는 친정과 같은 곳이었다. 생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 연기로 돌아올 운명이었다. 그를 소환한 것은 ‘동아리 동생’ 장진 감독이었다. 2011년 장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tvN 코미디 쇼 ‘SNL코리아’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잠깐 하고 말 줄 알았다던 ‘SNL코리아’ 무대에 내리 3년을 섰다. 당시 인기코너 ‘여의도 텔레토비’에서 MB와 시사평론가 진중권을 패러디한 진중건 등을 연기하며 정치 풍자개그를 선보였던 김원해는 “돈도 없고 겁도 없고 잃을 것이 전혀 없던 때라 신나게 (연기)했다”며 웃었다. 다시 무대에 섰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던 때였다.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바쁜데도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일년에 공연은 두 작품을 하겠다는 각오는 변함 없다. 김원해는 “아내는 지금도 연극한다는 말만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면서도 “영화나 방송에선 아직도 작은 역할을 하지만 무대는 나에게 허락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NL 코리아’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고 코믹 이미지를 얻었지만 김원해는 스스로 코믹 배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정한 캐릭터로 규정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코믹한 캐릭터라도 이 작품에서 표준말을 썼으면 다음 작품에선 하다못해 사투리를 쓰고 머리를 빡빡 깎아서라도 다르게 보이려고 노력한다”고도 말했다.
연극배우 출신인데 술자리를 싫어한다고 했다. 여성 스태프와 커피숍에 앉아 몇 시간씩 수다를 떠는 게 더 편하다. 그는 “내가 술을 안 해서 늦게 빛을 보나 보다”며 웃기도 했다.
김원해는 ‘시그널’로 김혜수와 첫 연기 호흡을 맞췄다. 서민적인 정서에 애착을 지녀서일까. 미녀 스타 앞에 섰을 때 오랜 시간 연기를 단련해 온 그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첫 장면부터 NG를 냈어요. 김혜수씨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얼굴을 쳐다보는데 심장이 멎을 것 같아 도저히 대사를 내뱉을 수가 없더라고요. 한참 동안 혜수씨의 턱만 보고 연기했을 정도로 떨리더라고요(웃음).”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