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수용했던 원전
메이지 때부터 차별받던 후쿠시마
참사 이후 ‘오염 지역’ 이미지 각인
사회적 왕따 등 또 다른 차별 생겨
원전과 쓰나미, 다른 배상금
쓰나미가 덮쳐 집ㆍ사업장 잃어도
자연재해란 이유로 지원은 전무
원전 피해자들도 보상금 제각각
가정 붕괴에 깊어지는 상처
오랜 피난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부부 갈등ㆍ아동 폭력 증가로 표출
“원전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원전 사고 배상금을 두둑하게 받은 농촌 아주머니들이 비싼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풍경이다. 방사능 덕에 부자가 됐다는 말도 많이 한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18㎞ 떨어진 나라하의 50대 여성)
“마트에서 후쿠시마 출신(후쿠시마는 사투리가 심해 일본인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꼬마가 ‘어차피 돈 많으니까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자’면서 카트에 물건을 마구 담는 것을 봤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나, 다 우리가 낸 세금이다.” (도쿄 거주 누리꾼)
원전 사고 피해자들에게 주는 배상금은 후쿠시마 안팎으로 ‘뜨거운 감자’였다. 취재진이 만난 피해자 대부분은 “고향과 생업을 잃은 데 비하면 보상 및 배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원전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어 일회성으로 배상을 받았거나, 아예 제외된 이들은 “배상금 남발로 피해자들은 부자가 됐고 나태해졌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주민끼리, 피해자끼리 갈라지고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건 돈 문제가 걸린 정부 주도의 대규모 프로젝트 앞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 양상이다. 특히 핵 관련 시설은 그 위험성 탓에 발전소를 새로 짓는 것부터 핵폐기물 처리장이 지정될 때까지, 해당 지역의 희생과 금전적 보상 및 배상을 맞바꾸는 식으로 처리되어 왔다.
차별 또 차별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에서 “원전은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타자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국가적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도호쿠전력 관할지인 후쿠시마에 도쿄전력이 원전 두 곳을 운영하고 있고 그 원전의 리스크를 후쿠시마 주민들이 먼저 짊어지고 있는데도 이익은 간토 지방, 즉 도쿄전력 관할지역에서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전을 유치한 지역은 막대한 교부금을 받는다. 하지만 다카하시 교수는 애당초 왜 이들이 원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원전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치체는 일본 근대화 과정 속에서 인구 유출 등으로 경제적 약자 처지에 놓인 곳들이다. 실제 후쿠시마는 원전이 들어선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농촌’ 이미지를 안고 있었다. 그 연원은 메이지유신 시대로 거슬러가는데, 후쿠시마를 포함한 도호쿠지방 군대가 보신전쟁에서 관군에 패배했고 그 때부터 이 일대는 ‘백하이북 일산백문’(白河以北 一山百文)’과 같은 말로 차별의식에 시달렸다. 17세기 하이쿠(일본 고유의 시 형식) 시인 마쓰오 바쇼가 쓴 이 문구는 ‘이북 도호쿠 지방은 산 하나 값이 100문, 싸구려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난과 차별 때문에 원전을 수용했던 후쿠시마에는 참사 이후 또 하나 차별이 더해졌다. ‘오염 지역’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후쿠시마 번호판이 붙은 차량 진입 및 주차를 거부하는 곳이 생겨났고, 다른 지역으로 피난 간 후쿠시마 출신 아이들은 학교나 동네에서 따 돌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터넷에는 ‘후쿠시마현은 일본의 쓰레기통’이라거나 ‘후쿠시마 주민들을 어디에 내다버리지’와 같은 모욕적인 말들이 오고 갔다.
현재 후쿠시마 밖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동정 반, 공포 반이다. 도쿄에 거주하는 호시노 요코씨는 “사고 이전부터 후쿠시마라는 지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낮았다. 이제는 후쿠시마를 떠올리면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원전피해자 쓰나미피해자
“같은 지역에 있는 가설주택이라도 원전 피해자냐 쓰나미 피해자냐에 따라 형편이 영 딴판이에요. 이들 간 보이지 않는 긴장이 팽팽하죠.”
메구미(가명)씨는 원전과 쓰나미 이중 피해지역인 나라하 출신으로 현재 니혼마츠에 살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11일 쓰나미가 덮쳐 집인 동시에 사업장이던 펜션을 잃었다. 인근에 살던 부모님과 자매의 집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쓰나미 피해가 더 컸던 미야기현 친척 세 명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자연재해라는 이유로 정부는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이후 나라하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도쿄전력은 재산손실과 영업손해, 피난으로 취업이 불가능해진 경우 각종 배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 대한 배상은 끝내 받지 못했다. “어차피 쓰나미로 집이 사라질 것 아니었냐”는 것이었다. 원전 피해는 배상하지만 쓰나미 피해는 보전해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은행 대출을 받아 지은 펜션이었다. 대출 원금과 이자는 고스란히 제 몫이 됐다. 스스로 삶을 재건해야 했다. 그는 “가설주택에서 이틀 만에 나와 일을 찾아 다녔다. 두 달 뒤 니혼마츠로 오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웃들 도움 덕에 새 삶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3.11 피해자를 돕는 시민단체 ‘글로벌미션재팬’ 오노 이즈미 부대표도 상황이 모두 다른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대책위원회를 꾸렸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피난민 간에 한참 동안 싸움에 가까운 고성이 오갔다”면서 “우리는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을 지원하고자 했다”고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원전 피해자와 쓰나미 피해자 삶에는 큰 차가 있다. “원전 피해자는 돈을 받아도 결국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파친코로 시간을 보내거나 알콜 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반면 쓰나미 피해자들은 일을 하면서 과거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례가 많지요.”
일본 내각부가 집계한 자살자 통계에서도 두 피해자들의 극명한 차를 확인할 수 있다. 후쿠시마현 내 자살자는 2011년 10명에서 2015년 19명으로 약 두 배 늘어난 반면 미야기현와 이와테현은 2011년 각각 22명, 17명이었으나 2015년 각각 1명, 2명으로 눈에 띄게 줄었다. 후쿠시마는 원전 피해자가, 미야기와 이와테는 쓰나미 피해자들이 집중돼 있는 지역이다.
천차만별 배상금
후쿠시마 내 갈등은 원전 피해자와 쓰나미 피해자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원전 피해자 사이에서도 배상액 차이가 커 불만이 높다.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 정도에 따라 원전 피해지역을 크게 ▦귀가곤란(1인당 1,450만엔) ▦거주제한(720만엔) ▦귀향예정(480만엔) 등으로 나누고,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차등 지원했다. 이외에도 재산피해보전비, 실업지원비 등을 더하면 각 가정이 받는 돈은 제 각각이었다.
“다들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관광객도 끊기고, 일자리라고는 원전관련 일 뿐인데 원전과 가까운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은 일하지 않고도 생계가 가능하니 저희가 더 큰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죠.” 원전에서 50㎞ 떨어진 이와키에 사는 모리 한나씨는 솔직한 속내를 내비쳤다. 하와이안 리조트로 유명한 이와키는 연중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가설주택에 사는 피난민들과 제염 및 폐로 작업에 투입되는 원전노동자들로 붐비는 낯선 도시가 돼버렸다. 이와키 주민 대부분은 사고 직후 1인당 12만엔의 배상금을 받은 것이 전부다. 모리씨는 “인구가 늘어나니 집값이 오르고 병원에 가도 무상진료 대상 원전 피해자들로 넘쳐난다”면서 “정작 이와키 주민들 삶이 팍팍해지는데 어떻게 이들을 무작정 반기겠나”라고 반문했다.
방사능 오염이 심한 지역 한 편의점 점주도 “원전노동자는 넘치는데 문 연 상점이 없어 늘 일손이 달린다. 시급이 높은데도 지역민들은 일하러 오지 않아서 이와키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자가용을 몰고 출근한다”고 했다. 실제로 같은 세븐일레븐이지만 강제피난지역인 이다테무라점은 시간 당 1,250엔(교통비 별도), 이와키 내 점포는 730~800엔을 지급한다.
2014년 이와키 메이세이 대학교가 이와키 주민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총 678명) 중 74.2%가 보상 및 배상금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답했다. 심지어 64.6%는 피난민들이 높은 배상금을 받는 것이 “부럽다”고 답하기도 했다.
깊어지는 상처
원전 사고는 후쿠시마 안팎을 갈라놓았고, 후쿠시마 내부도 분열시켰다. 가정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비극이 잇따랐다. 지난해 11월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후쿠시마 현 내 가정폭력상담센터 상담 건수는 2011년 이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신문은 “2015년 상반기(4~9월) 상담 건수는 781건으로 2014년의 56%에 달했다”며 “도호쿠 대지진 이후 피난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경제적 어려움이 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신고사례 중에는 가설주택에서 벌어진 폭행이나 가족간 배상금 배분 문제 등이 있었다.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 ‘타라치네’(모친이라는 뜻) 소속 활동가인 노자키 아유미 씨도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아이 양육 문제에서 부부 간 갈등이 잦다”며 “가설주택 생활이 장기화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동폭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층위의 커뮤니티가 무너지는 동안 그러나 정작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에 대한 분노는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가령 대형지진과 쓰나미에 대비하라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지적을 받고도 노후원전을 계속 운전했던 도쿄전력이나 시민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데도 위험원전 가동을 허가한 정부를 향해 계속 성난 목소리를 높일 법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첫 원전 재가동이 있었던 지난 해 8월11일 취재진이 현장 방문했을 때도, 주민들의 동요나 분노표출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성향이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정부와 전력회사의 외면에 이제 분노할 힘도 남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5년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사회는 허물어졌고 주민심리는 왜곡되고 말았다. 배상금이 얼마가 됐든, 이건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피난민 메구미 씨는 정말로 사고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3.11 이후 내가 정말로 잃은 것은 집이 아니라 단골손님과 이웃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추억과 그 공기였습니다.”
후쿠시마=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다무라 히사노리 프리랜서기자 hisanori.ymr@hotmail.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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