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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펜, 우리 시대의 권력 문장(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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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펜, 우리 시대의 권력 문장(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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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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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장식적 요소로 각광받고 있는 와펜은 문장(紋章)이 상징하는 권력의 통치와 지배를 자연스레 주입하는 ’시각‘적 장치다. 게티이미지뱅크
패션의 장식적 요소로 각광받고 있는 와펜은 문장(紋章)이 상징하는 권력의 통치와 지배를 자연스레 주입하는 ’시각‘적 장치다. 게티이미지뱅크

‘패션보다 강력한 독재자는 없다’라는 격언이 있다. 고전시대의 로마를 배경으로 나온 말이다. 로마인들에게 옷은 사회적인 의미를 띠었다. 영어의 드레스(Dress)란 단어는 중간의 어근을 차지하는 ‘RES’가 라틴어의 법을 뜻하는 ‘REX’란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옷은 한 인간의 장식 욕구를 넘어 한 사회 내부에 인간의 좌표를 표현해주는 형식이었다. 1세기 중엽 로마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던 세네카는 ‘인간은 이성보다 패션을 따른다’며 당시 일년 동안 수 차례 변모하는 여성 헤어스타일에 대해 일갈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토가라는 헐렁하게 주름을 잡은 옷을 입었다. 원래는 남녀의 성별 및 신분의 구별 없이 전 계층이 입던 옷이었으나, 로마 공화정에 이르러 귀부인들은 토가를 입지 않았다. 매춘부들과 간통 혐의로 이혼을 당한 여성들은 토가를 입었다. 여성의 토가는 곧 사회적 배제를 뜻했다. 반면 황제들과 고위 정무관들이 입음으로써 신분 표시에 더욱 방점을 찍게 되었다. 토가는 오늘날 토스카나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테베르나(Taberna)란 전통의상을 로마가 가져온 것이다. 토가의 색깔과 형태는 착용자의 지위에 따라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원로원 의원들과 장차 원로원 의원이 될 사람들은 흰색의 토가 칸디다를, 자유민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들은 사춘기가 될 때까지 자줏빛 테두리가 있는 토가 프라에텍스타를, 사춘기에 들어선 청소년은 검소하고 수수한 남자용 토가 푸라 또는 토가 비릴리스를, 상을 당한 사람들은 검은색의 토가 풀라를 입었다. 검정색 토가는 특히 정치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거나 의회에서 절차적 정의가 무시당했을 때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저항‘의 의미로 입었다. 이미 이때부터 ’근조 민주주의‘를 외치며 일방적 법안 통과에 반대해 검정색 양복과 넥타이를 매는 습관이 만들어졌다는 건 놀랍다. 로마의 집정관들은 장군의 개선 행진에 참석할 때 화려하게 올리브 가지를 수놓은 토가 픽타를 입었다.

사실 토가는 입으면 매우 어색해 보이는 옷이었다. 로마의 작가들은 토가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게다가 세탁도 자주 해야 해서 옷이 쉽게 닳다 보니 교체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서 항상 로마 풍자작가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무겁고 긴 한 장의 천을 몸에 둘러 우아한 주름을 내려면 보통 두세 명의 하인이 수 시간에 걸쳐 작업을 해야 했다. 이렇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옷을 왜 권력자들이 입어야 했을까? 토가는 그 자체로 권력의 문법을 새기는 도장이었다. 중세로 접어들면 기사들은 문장(紋章)을 통해 자신들의 가문을 자랑했다. 문장은 가문이나 단체 등을 표시하는 도형을 뜻한다.

작년부터 패션의 디테일로 다시 등장해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와펜이다. 의류나 모자에 꿰매 붙이는 장식이란 뜻이다. 옷을 리폼할 때, 이 와펜만한 효과를 내는 게 없다. 주먹보다 약간 크며, 방패 형태의 문장디자인이 많은데 독일어 ‘Wappen’(문장)에서 유래된 단어다. 원래 전쟁에서 피아 식별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국왕의 인가를 통해 세습될 수 있는 가문과 단체를 뜻하게 되었다. 문장은 13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각종 건물 및 제복, 도장, 미술품, 묘비 등에 자신의 가문을 각인해 넣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포도주의 라벨, 정당 로고, 도시의 상징물도 일종의 와펜이 됐다.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는 모든 사물과 통용되는 가치 체계에 명시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겨 넣은 것이다. 내가 보고 입고 쓰고 경배하는 모든 것에 녹아있는 가문의 문장을 본다는 것은, 결과로서 문장이 상징하는 가문의 통치와 지배를 자연스레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교묘한 시각 권력의 작동이다. 시선을 의미하는 ‘Regard’라는 단어에 왜 ’유념하다‘ 또는 ’경의를 표하다‘라는 부가적인 의미가 붙었을까?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그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쪽에서 숨긴 응축된 욕망을 보는 이들에게 새기는 것이다. 패션은 결국 교묘한 시각적 설득의 기술인 셈이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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