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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김광진,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서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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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김광진,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서게 된 사연

입력
2016.02.24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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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아침 그가 여느 때처럼 지역구 출마를 준비 중인 전남 순천의 자택을 나서 서울행 KTX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이런 ‘난리’가 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오후로 예정된 의원총회와 본회의 참석도 빡빡할 만큼 시간이 모자라 점심도 건너뛰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남자는 이날 자정을 넘긴 24일 0시39분. 사고를 쳤습니다. 한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른 10개 중 1,2위에 그의 이름(‘힘내라 김광진’ ‘김광진’)이 보였습니다. 단상을 내려와 자신의 의석으로 돌아가는 동안 30여 명의 더민주 의원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젊은 의원의 등을 두드리거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어줬습니다. 그런 환영을 받는 당사자는 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3일 저녁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5시간 32분 동안 연설을 한 김 의원 뒤로 정의화(왼쪽부터) 국회의장, 이석현 국회부의장, 정갑윤 국회부의장. 연합뉴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3일 저녁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5시간 32분 동안 연설을 한 김 의원 뒤로 정의화(왼쪽부터) 국회의장, 이석현 국회부의장, 정갑윤 국회부의장.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초선 의원 김광진 의원 얘기입니다. 그는 332분 동안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똑바로 서서 쉬지 않고 말을 했습니다. 중간중간 물로 입술을 적시고(물을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밭은 기침을 내뱉을 때 빼고는 계속 말을 한 셈이죠.

그가 이날 친 사고는 ‘필리버스터(fillibuster)’입니다. ‘무제한 토론’이라 해석하는 필리버스터는 정치학 전공 서적이나 시사 상식 책에서나 등장하는 낯선 단어입니다. 최근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맞대결을 펼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이 2010년 12월10일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 연장안을 막기 위해 8시간 37분동안 연설을 했습니다. 이 필리버스터로 샌더스는 미국 방방곡곡에 이름을 알렸고, 연설 내용은 책으로도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난해 KBS의 드라마 ‘어셈블리(assembly)’에 나오는 초선 의원 진상필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다 탈진하고 쓰러진 모습 정도가 나왔습니다. 이렇듯 드라마나 해외 토픽에서나 볼 법한 그 단어를 우리 눈 앞에 펼쳐 보인 김광진 의원이 과연 멀쩡한지가 궁금해서 본회의장 앞으로 쫓아가서 확인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할 것을 대비해 필리버스터(의화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의사진행 방해행위)를 실행한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광진 의원이 4시간째 무제한 토론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할 것을 대비해 필리버스터(의화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의사진행 방해행위)를 실행한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광진 의원이 4시간째 무제한 토론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뉴시스

다소 상기된 표정이라는 것 빼고는 멀쩡했습니다. 아니 멀쩡해 보였습니다. 곁에 있던 비서는 “드신 게 하나도 없으세요”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습니다. 필리버스터 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으니 결국 하루 종일 굶다가 토론 끝나고 당에서 준비해 준 바나나, 면, 김밥 조금 먹은 사람치고는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입 주변의 수염이 거뭇거뭇 자란 것이 오히려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몇몇 기자들이 김 의원 주변에 몰려들어 좀 전에 사고친 당사자에게 어떻게 해서 사고를 쳤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왜 1번 타자로 나서시게 된 겁니까?

“의총에서 이종걸 원내대표가 갑자기 필리버스터를 하자고 하니 다들 의아해 했죠. 그런데 자꾸 제가 해야 할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어요. 테러방지법을 다루는 정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니까요.”

젊어서, 어려서 그런 건 아니구요?

그것도 뭐…(쓱 웃습니다) **1981년생. 그는 더민주 현역 의원 중 최연소 의원입니다.

더 할 수 있는데 일부러 내려 오신 건가요?

더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했다가는 똑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아서 내려왔습니다.

5시간 30분 동안 똑 같은 얘기를 안 하셨다는 거예요?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실제로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기승전결을 맞춰가려 애썼다.

사실 그가 대한민국 국회에서 52년 만에 필리버스터를 한다고 할 때만 해도 당내에서도 사고를 칠 것이라 기대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한 당 핵심 관계자는 “의총에서 필리버스터 얘기를 꺼냈을 때 부정적 여론이 더 강했다. 해 본 적도 없고, 괜히 했다가 총선 앞두고 역풍 불면 어떻게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원내대표가 이 방법 아니면 무조건 밀어붙이려 하는 국회의장이나 새누리당의 부당함과 법안의 문제점을 알릴 방법이 없다고 설득했다”고 전했습니다. 치밀한 계획에 따른 고도의 노림수 라기 보다는 새누리당이나 임기 동안 이유 없는 직권상정을 하지 않겠다던 정의화 의장이 ‘국가의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직권상정을 밀어붙이자 맞불을 놓자는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내대표단 역시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1번 타자가 초선 의원이니 말이죠. 마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7차전의 선발 투수로 신인 선수가 나선 모양새입니다. 그가 필리버스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당내에서는 ‘얼마나 하겠어’ ‘만약 제대로 못 버티면 완전 꽝’이라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어. 어…’ 하는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토론 시작 후 4시간이 지나자 의장석에 있던 같은 당인 더민주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심히 걱정이 된 듯 “힘들면 다른 의원에게 넘겨도 된다”며 ‘유혹’을 했지만 김 의원은 계속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5시간이 지난 자정을 전후로 눈이 살짝 풀리고 기침 횟수가 부쩍 늘면서 ‘저러다 잘못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는 처음의 그 목소리 톤 그대로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이 그토록 처리하고 싶어하는 테러방지법이 무엇이 문제이고, 이 법이 통과되면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 어떤 변화가 닥쳐올 지를 지적했습니다. 김 의원이 발언 중간에 탁자 위에 놓았던 종이 뭉치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김 의원의 한 보좌진은 “따로 준비할 시간이 없으셨죠. 평소 의정보고 하거나 상임위 활동 하면서 준비했던 자료만 들고 무작정 올라갔습니다”라는 답을 줬습니다.

그가 멈추지 않고 발언한 332분(5시간 32분)은 고 김대중(DJ) 대통령이 1964년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이 김준연 자유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상정하자,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해 본회의장에서 발언했던 319분(5시간19분)을 뛰어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김 의원은 기록 얘기를 꺼내자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도대체 테러방지법이 뭐가 문제길래 국회의원들이 저렇게까지 하나라는 관심과 궁금증을 가지셨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24일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첫번째 토론자로 나서 5시간 32분 동안 발언을 마치고 의원들의 격려를 받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24일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첫번째 토론자로 나서 5시간 32분 동안 발언을 마치고 의원들의 격려를 받고 있다. 뉴스1

기자들이 김 의원 주변에서 질문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이 본회의장에서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나오면서 김 의원 쪽을 응시하며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협상 파트너인 이춘석 더민주 원내수석부대표와 조원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나란히 걸어나왔습니다. 그들 역시 하루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죠. 전날(23일) 오전만 해도 새누리당은 이날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통과를 확실시 했다고 합니다.

더민주의 최연소 의원이 친 사고의 여파는 최소한 며칠은 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춘석 수석부대표는 이날 심야 기자 간담회에서 “지원자가 없을 때까지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새누리당을 압박하기 위한 협상용 발언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 동안 여당과 협상 때마다 ‘얻은 것 없이 다 졌다’ 비판을 받았던 더민주 원내대표단 입장에서는 간만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죠. 물론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재협상은 없다”며 못을 박았습니다. 52년만에 필리버스터의 등장이 여의도 정가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지켜볼 만한 일입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필리버스터 정국’ 부른 테러방지법은 뭐길래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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