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퇴폐 이유로 금지곡 지정되자 은퇴
전공인 미술에 전념 교수로 활동
“입술 부르트게 다시 노래 연습해
재즈풍의 개여울 등 앨범에 담아
4월엔 첫 단독 콘서트도 준비”
지난해 7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 한 스튜디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흰 셔츠를 입은 한 여인이 잔뜩 긴장한 채 마이크 앞에 섰다. 때 아닌 여름 감기에 배탈까지 나 미음으로 속을 달래며 어렵게 선 자리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지친 몸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밀레의 풍경화를 보듯 평온했다. 먼 길을 걸어온 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여유로운 소리였다. 노래가 끝나자 녹음실 밖에 앉아 숨죽였던 이들이 일어서 환호를 질렀다.
처연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탄성을 이끈 주인공은 1979년 돌연 은퇴를 선언한 가수 정미조(67)다. 새 앨범 작업을 위해 44년 만에 ‘개여울’을 녹음실에서 다시 부른 그는 “오랜만의 녹음이라 긴장을 해 몸 상태가 안 좋아 체중이 4㎏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과연 내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부담이 컸는데 노래를 부르다 보니 옛 생각이 나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며 쑥스럽게 웃기도 했다.
‘휘파람을 부세요’와 ‘불꽃’ 등으로 1970년대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불렸던 정미조가 돌아왔다. 재즈풍으로 다시 부른 ‘개여울’과 ‘귀로’ 등 11곡의 신곡이 실린 새 앨범 ‘37년’을 24일 내면서다. 화가의 길을 걷겠다며 무대를 떠난 뒤 무려 37년 만의 복귀다. 재즈계의 유명 색소포니스트 손성제가 음반 프로듀스를 맡아 노장의 복귀를 도왔다. 앨범 발매일인 24일 한국일보를 찾은 정미조는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며 벅차했다.
세월이 흘러 늘어난 주름만큼 정미조의 우아한 목소리도 깊어졌다. ‘그렇게 우린 또 흘러가고, 난 다시 노래를 하네’(‘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가사를 듣다 보면 그의 삶이 흑백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펼쳐진다. 정미조는 “‘다시 만나요’ 등은 라틴 풍의 곡이라 그 리듬이 내겐 생소해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연습했다”며 고충도 털어놨다. 인생의 회한을 담은 ‘귀로’를 부를 때는 “내 얘기 같아” 목이 메여 몇 차례 눈물도 쏟았다.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 92년 귀국한 정미조는 20년 넘게 화가로 살았다. 은퇴 뒤 36년 동안 가요계로 돌아오지 않은 건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그를 흔든 건 가수 최백호다. 2년 전인 2014년 최백호가 “앨범을 내보는 게 어떻겠냐”며 음반 제작자를 소개해 준 게 계기가 됐다. 수원대 조형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정년 퇴임(2015년)을 앞둬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데다 그간 숨겨왔던 “노래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용기를 냈다. “교수로 재직할 때 신입생 환영회 등을 가면 다른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노래를 그렇게 권했어요. 다들 좋아해줬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꼭 입을 다물고 있어야 되나’ 란 생각을 하기도 했죠, 하하하.”
갑작스런 은퇴에 대한 속사정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정미조는 “애초 3년만 노래하고 무대를 떠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미술에 대한 욕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대 이상의 인기를 얻어 7년 동안 가수로 활동을 하게 됐는데, 군사정권 시절 ‘휘파람을 부세요’와 ‘불꽃’ 등이 퇴폐적이란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은퇴로 마음을 굳혔다. 정미조는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을 잃은 기분이었다”며 “내가 3년만 노래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오래해 이런 일을 겪는구나 싶었고, 가수를 그만두라는 소리로도 들려 떠났다”고 말했다.
정미조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13년 동안의 프랑스 유학 생활이다. 그는 “고독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시간”이라고 했다.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아세요?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 절에 있는 스님이 아마 나보다 사람을 더 많이 만날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정미조는 파리 야경을 그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79년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낡은 건물 다락방에서 살며 홀로 눈물을 떨구던 시기다. 정미조는 외로움을 딛고 파리7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92년 귀국해 강단에 섰다. 24년 동안 미술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던 그는 “눈이 나빠져 1년 반 전부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가수로 산 삶이 내게 달콤한 외도였다면, 화가로서 산 24년은 내 본연의 삶에 충실했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72년 스물 셋에 가수로 데뷔한 정미조는 이화여대 서양학과 재학시절부터 교내 스타였다. 노래를 잘해 대학 2학년 때인 70년 파월(베트남)장병위문공연단의 일원으로 공군 특별 비행기편을 타고 베트남에 가서 공연을 할 정도였다. 170㎝의 늘씬한 키에 예쁜 외모 때문에 그를 따르던 남학생도 많았다. 데이트를 해도 오후 10시면 기숙사로 들어가야 해 ‘이대 신데렐라’로 통했다. 경기 김포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랐지만, 그는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지하 상가에서 옷을 살” 정도로 검소하다.
일흔을 앞두고 다시 마이크를 잡은 정미조는 4월1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고 관객들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이젠 제 삶을 노래로 들려줄 때 인 것 같아요. 인생의 세 번째 문이 열린 것 같아 기대가 커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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