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변호사
민ㆍ형사 안 가리고 사건 수임
승산 없고 가난하다고 외면 안해
국가ㆍ고용주 상대로 승소 이끌어
뉴욕주 사형제 폐지에 결정적
강간살인 혐의 받는 19세 흑인
“강압에 의한 자백” 무죄 변론
미란다 원칙 확립에 큰 기여
법원은 일의 진위와 곡직을 따지고 형편의 경중과 과다를 최종적으로 가리는 문명사회의 제도 공간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진실이 늘 이기는 건 아니다. 그건 법 자체의 한계 탓이기도 하고,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고 이용하는 이들의 대립적 이해가 은밀하게, 당당하게 얽혀 드는 탓이기도 하다. 진실의 승리가 또 언제나 정의의 승리랄 수도 없다. 그것은 사회의 통념과 상식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법원 판결을 그냥 정의가 아니라 ‘법적’ 정의라 부르는 까닭도 그 판단이 여러모로 온전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허다한 법정 드라마들이 그리는 어떤 정의의 승리와 의연한 패배가 늘 처음처럼 감동적인 이유는, 그게 그만큼 드물고 어려워서다. 법원은 진실과 정의가 최종적으로 짓밟히고 묻히기도 하는 공간이다.
미국 변호사 마이런 벨도크(Myron Beldock)는 ‘가만한 당신- 루빈 카터(Rubin Carterㆍ2014년 5월 10일자)’편 귀퉁이에 잠깐 등장한 바 있다. 1966년 백인 세 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흑인 프로권투 선수 ‘허리케인’ 카터가 투옥된 지 19년 만에 풀려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변호사가 그였다. 벨도크는 원심 증인이 위증했다는 자백을 받아내 76년 뉴지저 법원의 재심 재판을 성사시켰다. 재판에서 증인이 다시 자백을 번복하는 바람에 카터는 두 번째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벨도크는 9년 뒤인 85년 검찰과 경찰이 감추고 조작한 증거 등을 찾아내 연방 법원에 구속적부심을 신청, 마침내 “(뉴저지 법원 판결이) 이성이 아닌 인종주의에, 공개가 아닌 은폐에 근거한 것”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는 “진짜 이야기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정말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집요하고 끈질긴 변호사 벨도크의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 할 차례다. 그가 누명 쓴 기결수에게 자유를 되찾아준 게 카터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는 이야기, 진실과 정의의 승리라는 “정말 힘겨운 싸움”들의 이야기. 그가 2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마이런 벨도크는 1929년 3월 2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사였다. 군대를 마치고 58년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그는 브루클린 검찰청 검사보로 2년 남짓 근무한 뒤 변호사가 됐고, 64년 ‘벨도크, 레빈 & 호프만’이라는 로펌을 열었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인권변호사들과 달리, 그가 처음부터 특별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로펌 동료 변호사 조너슨 무어(Jonathan Moore)는 벨도크를 “이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제너럴리스트(…) 대도시에 개업한 진짜 소읍 변호사”라고 요약했다.(New York law journal, 2016.2.3) 동네 사람 온갖 아픈 데를 도맡아 진료하던 옛날 의사들처럼, 그는 민사든 형사든 파산이든 이혼이든, 안 가리고 맡았다는 거였다. 수임 사건 대부분은 사소하고 잡다한 일상의 송사거나 술자리 난투극 같은 형사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의 의뢰인들은 고용주나 국가 기관을 상대해야 하는 빈민 혹은 흑인이 많았다. ‘루저들의 변호사’라는 소문이 난 뒤로는 이미 졌거나 승산이 없는, 돈 없고 희망 없는 이들이 그를 찾아오곤 했다. 2014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인권 변호사라는 영예가 버거운 듯 “내가 불의를 바로잡고 우리 사회의 사법 정의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했던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어떤 사건이든 닥치는 대로 맡아 했을 뿐”이라고, “나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약자의 법 인권이 지금보다 더 취약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질까 봐 지레 위축되지도, 졌다고 쉽게 돌아서지도, 돈 없다고 냉큼 외면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맡았고, 더러 이겼다. 2004년 공권력 남용 소송을 맡아 고전 끝에 뉴욕 경찰을 상대로 승리한 그를 뉴욕타임스는 “이상주의적 기질의, 물고 늘어지기의 영웅(a hero to some for stubborn stick-to-itiveness tinged with idealism)”이라고 소개했다.(2004. 9.21)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첫 사건은 1963년 8월 28일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이른바 ‘직장여성 살인사건(Career Girl Murders)’이었다. 룸메이트였던 ‘뉴스위크’ 조사원 재니스 와일리(당시 21세)와 교사 에밀리 호퍼트(당시 23세)가 집에서 강간 당한 뒤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가 백인 전문직 직장인이라는 점, 수십 군데씩 칼로 난자 당한 점이 당시로선 충격적이었다. 이듬해 4월, 고교 중퇴 학력의 19세 흑인 조지 위트모어(George Whitmore Jr)가 체포됐다. 며칠 뒤 공개된 61쪽짜리 경찰 조서에는 그가 맨해튼 살인사건 외에도 체포되기 몇 주 전 미니 에드먼즈(Minnie Edmonds)라는 여인을 강간 살해했고, 엘바 보레로(Elva Borrero)라는 또 다른 여성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자백이 포함돼 있었다.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위트모어는 재판도 받기 전에 ‘연쇄강간살인마’가 됐다.
재판에서 위트모어는 백인 경찰들의 구타 등 가혹행위를 못 견뎌 뭔지도 모른 채 조서에 서명했을 뿐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맨해튼 사건 당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광장 연설과 시민인권 행진이 있던 날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뉴저지 와일드우드 고향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봤다는 사실, 그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친구들의 증언이 지역 신문에까지 보도됐지만 검찰은 묵살했다. 변호를 맡은 벨도크는 경찰이 제시한 증거들, 예컨대 위트모어가 소지하고 있었다는 한 피살 여성을 닮은 사진과, 그의 집에서 찾아냈다는 사건 현장 약도 등에 맞서 분투했다. 물론 조작된 것들이었다.
재판이 한창이던 65년 다른 범행으로 체포된 22세 백인 남성(리처드 로블레스ㆍ종신형 선고)이 조사 중 맨해튼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위트모어의 자백이 강압에 의해 조작됐다는 게 사실상 입증됐지만 검찰은 그를 에드먼즈 사건의 피의자로 재판을 강행했다. 벨도크는 유일한 유죄 증거인 자백의 무효를 주장하며 지치지 않고 변론했고, 재판은 배심의견 불일치(hung jury)로 종결됐다. 강간미수사건에서 위트모어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73년 4월이었다.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피해자는 경찰이 나란히 세운 용의자들 가운데 유일한 흑인이던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에서 피해자는 벨도크의 끈질긴 반대 심문에 화를 내며 “그런 일을 겪은 뒤 사는 게 어떤 건지 아느냐?”고 따졌고, 벨도크는 “(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어떤 건지는 아느냐”고 반박했다.(NYT, 2016.2.1)
위트모어(2012년 작고)가 저 모든 사건에서 결백했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경찰과 검찰은 벨도크가 “시민의 자유를 명분 삼아 법의 권위를 갉아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찰의 강압수사와 진술 조작, 언론의 성급한 보도와 편견에서 저 일들이 비롯됐다는 사실이었다. 위트모어 재판은 65년 뉴욕 주가 형법을 개정해 사형제를 폐지(경찰 피살사건 제외, 뉴욕 주는 1995년 사형제를 부활했다가 2004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주 의회는 위트모어 사건을 인용하며 “우리는 61쪽에 달하는 완벽하고 치밀한 범인의 자백이 경찰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밝혔다.(NYT, 2012.10.15) 1966년 연방대법원은 ‘미란다 원칙(범죄 용의자에 대한 변호사 조력권과 진술 거부권 고지 원칙)’을 판결로 확립하면서, 위트모어 사건을 “가장 눈에 띄는 사례”로 언급했다.
1989년 4월 19일 오전 9시 센트럴파크로 조깅을 하러 나간 한 여성이 오후 2시께 공원 후미진 곳에서 강간과 폭행을 당한 뒤 기절한 채 발견됐다. 환한 대낮에 도심 복판 공원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당일 밤 공원을 배회하던 흑인과 히스패닉계 10대 소년 다섯 명이 체포됐고, 며칠 뒤 경찰은 그들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그들을 ‘이리떼(Wolf Pack)’ ‘야수(wilding)’ 등으로 명명하며 사건 전모를 전했다. 유죄 입증 자료는 자백이 전부였다. 피해자에게서 채취한 정액은 용의자 누구의 DNA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훗날 켄 번즈(Ken Burns,2002)의 다큐멘터리 ‘The Central Park Five(2012)’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들은 사건 당시 공원에 있지도 않았고 각자의 진술 역시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많았다. 재판에서 그들은 구타를 못 견뎌 자백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각각 8~12년형을 선고했다.
살인ㆍ강간 혐의로 33년 형을 선고 받고 수감돼 있던 마티아스 레이스(Matias Reyes)라는 이가 센트럴파크 사건이 자기 짓이라고 자백한 건 2002년 1월이었다. 그는 사건 3개월여 뒤인 89년 8월 다른 사건으로 체포됐다. 뉴욕 시를 상대로 한 ‘이리떼’ 5명과 피해 여성의 소송이 시작됐다. 뉴욕시는 경찰 조사 과정에 아무런 하자가 없었으며 자백 사실에 근거해 기소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014년 9월 뉴욕시는 그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피해자들에게 4,1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벨도크는 레이스의 자백에 있기까지 그들의 결백을 믿으며 포기하지 않은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99년 정신 질환을 앓던 31세 유대인 청년이 망치를 들고 난동을 부리다 경찰이 쏜 총에 12발을 맡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족은 과잉 진압이라며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뉴욕 경찰은 현장 경찰 증언과 목격자 진술 등을 총 동원해 희생자를 ‘악마’로 만들었고, 1심에서 경찰 측은 승리했다. 항소심에 가족 측 변호인으로 가담한 벨도크는 총을 쏜 경찰관이 경미한 찰과상밖에 입지 않은 까닭을 추궁했다. 경찰관은 방탄조끼 덕이었다고 해명했다. 총을 쏘기 전 다른 진압 방법을 왜 사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경찰관은 페퍼 스프레이를 썼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어서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벨도크는 숨진 청년의 눈이 후추가스로 거의 실명에 이른 상태였음을 밝히는 부검 자료를 배심원단 앞에 제출했다. 뻔한 질문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한 뒤 기습 공격한 셈이었다. 승소 직후인 2004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때는 나도 사람들이 생각하듯 세상이 점점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이다. 세상은 이상이 아니라 권력과 돈에 의해 움직인다.(…) 세상을 나아지게 하려면, 맞설만한 이유(cause)가 있는 한 끝까지 맞서는 도리밖에 없다.”
2013년, 84세의 벨도크는 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그는 16살 소녀를 유괴ㆍ살해한 혐의로 92년 체포돼 실형을 선고 받은 이버튼 웩스태프(Everton Wagstaffeㆍ47)의 무료 변론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사건 당시 23살이던 웩스태프는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감옥에서 혼자 글을 익히고 법을 독학해 직접 재심 청구 서류를 작성할 만큼 죽을 힘 다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가석방 기회조차 죄를 인정하는 꼴이라며 거부한 채 각계에 탄원서를 썼다. 거기 응답한 이가 벨도크였고, 뉴욕의 공익 법률단체들을 설득해 그의 변론에 가세토록 한 것도 벨도크였다. 벨도크는 공판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도록 항암 진통제까지 끊고 재판에 매달했다.(NYT, 16.2.2), 2014년 9월 항소 법원은 경찰과 핵심 증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 증거를 검찰이 감춘 사실을 들어 원심 판결을 기각했다.
한국인에게 소월의 어떤 시가 그렇듯, 아일랜드인들에겐 그들의 시인 세이머스 히니(Seamus Heaneyㆍ95년 노벨 문학상)의 희곡 ‘트로이 해법 The Cure at Troy)’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History says, Don’t hope/ On this side of the grave./ But then, once in a lifetime/ The longed-for tidal wave/ Of justice can rise up/ And hope and history rhyme.” 역사는 무덤가에서 희망을 찾지 말라고 말하지만, 살다 보면 갈망하던 정의의 파도가 솟구치기도 하고, 그 때 희망과 역사는 더불어 노래한다는 의미다.
웩스퍼드 소송에서 이긴 날, 뉴욕타임스의 한 아일랜드 출신 기자(Jim Dwyer)가 벨도크에게 전화를 걸어 외로운 추방자의 구원을 노래한 저 희곡의 시구를 들려주자 그는 “멋지네, 메일로 보내줄래? 난 할 일이 좀 있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NYT, 위 기사)
물론 그는, 정의의 파도란 저절로 솟구치는 게 아니라 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간신히 솟구치는 것이라고, 속으로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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