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최초로 美 대학 유학
이화학당 교사로 학생자치회 이끌어
제자 유관순에 “조선의 등불 돼라”
파리강화회의 고종 밀사로 뽑혀
베이징서 의문의 죽음… 日독살설
후손은 훈장수여 14년 만에 알아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본명 김란사ㆍ1872~1919)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하면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서 싸우거나 옥고를 치른 인물을 떠올리기 쉬운 탓에 여성 독립운동가 역시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정도다. 하지만 하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ㆍ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고종이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점 찍는 등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으나 후손조차 그의 활약을 뒤늦게 알 만큼 잊혀져 왔다.
구한말 평양에서 태어난 하란사(남편 성을 따름)는 일찌감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스물 한 살에 결혼한 뒤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기혼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자 외국인 교장을 찾아가 등잔불을 끄고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설득해 기어이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졸업 후에는 미국 웨슬리안대로 유학해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따기도 했다.
그는 귀국 후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유관순 열사도 그 중 하나였다. 제자였던 유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뒤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3ㆍ1만세 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하란사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
실패로 끝난 파리강화회의 밀사 파견 계획은 독립운동가 하란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세대가 그를 외면해 온 이유로 꼽힌다. 고종은 그가 유학 당시 의친왕과 웨슬리안대를 함께 다닌 인연을 알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선발했다. 자금으로 쓰라며 궁중 패물까지 손수 쥐어줬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하란사는 그 해 4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 교민의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가 음식을 먹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는 장례식 참석 선교사의 증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였던 배정자가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독살설이 전해질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하란사가 무장투쟁을 하지 않았고, 뚜렷한 족적이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라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에서 멀어져 간 하란사를 66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건 정부였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 자체 연구 끝에 “여성의 애국정신을 고취했다”는 공로를 인정,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훈장은 14년 동안 보훈처 캐비닛 안에 잠자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이던 친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혈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야 남편(하상기) 전처의 후손이 하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해 우연히 훈장 수여 사실을 알게 됐다. 하란사 남동생의 손자인 김용택(68)씨는 “고모할머니의 활약은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듣고 자랐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을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해 집안에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혜령 전 부장은 “하란사는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국제사회에서 조국을 대표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유관순 열사처럼 주목 받아야 할 여성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
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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