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더 이상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지 않는다. 자다가 갑자기 고열이 나거나 분리불안으로 이상행동을 하는 일도 없다. 이제 다 키운 것 같은 초등 1학년. 하지만 이 시기는 한국의 워킹맘들이 가장 많이 직장을 그만 두는, 체념과 절망의 2차 관문이기도 하다. 갓난쟁이 떼어놓고 야근도 불사하던 강철엄마들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면 심각하게 흔들린다. “아이가 1학년 되는데 직장 그만둬야 할까요?”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의 단골 질문 중 하나다.
초등학교 교사도 자기 자식 입학할 땐 휴직한다는 잔인한 1학년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규 학업과정의 기나긴 트랙에 올라서는 아이, 정서적으로나 학습적으로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돌봐야 하는데, 저녁 8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점심 먹으면 곧장 파하는 학교, 아직 시계 볼 줄도 모르는 아이를 두고 돌봄교실과 학원 뺑뺑이 사이에서 엄마들만 고민이 깊다. ‘워킹맘이냐, 전업맘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싶은 순간 ‘왜 아빠는 이런 고민 안 하나’ 분노의 불길이 치솟으며 부부싸움도 벌어진다. 워킹맘 최대의 난코스인 ‘마의 1학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 걸까?
확산되는 자녀입학 휴가제
공무원 최모(40)씨는 둘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지난해 1년간 휴직을 했다. 주변에서는 무슨 공부를 얼마나 시키려고 유난이냐고들 했지만, 공부 문제만은 아니었다. 생활습관이나 학습태도를 이때 잡아주지 않으면 향후 양육과정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첫째 때 이미 경험한 바다. 받아쓰기부터 엄마 힘을 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숙제, 친구 사귀기 등등 손 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올해 1월 복직한 최씨는 “같은 반의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공무원이라 좋겠다며 많이들 부러워했다”며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입학 후 첫 일년은 부모의 밀착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등 1학년의 공포’가 만연하면서 초등 입학을 대비해 휴직기간을 남겨두거나 유예하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육아휴직이 가능한 자녀의 나이가 2014년 만 8세로까지 확대된 덕분이다. 그렇다면 최대 1년인 법정 육아휴직을 어떤 비율로 나눠야 솔로몬의 지혜가 될까. 의견은 제각각이다. 3~7월까지 한 학기만 돌봐줄 수 있도록 5개월은 초등 1학년에 쓰고 나머지 7개월을 젖먹이 때 쓰라는 의견, 그래도 아기와의 애착 형성이 더 중요하니 한두 달만 남겨두는 게 좋다는 의견, 아기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 초등 1학년을 위해 통째로 아껴두는 게 좋다는 의견 등 다양하다.
초등 입학에 목 맬 것 없으니 쉬지 말라는 조언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업맘이건 직장맘이건 가리지 않고, 최소한 3월 한 달간이라도 휴직할 수는 없느냐는 가슴 아픈 조언들만 게시판에 줄줄이 달린다.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이 이토록 중요한 생애사적 사건인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해 입학 후 단 한 달간이라도 아이 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요구를 반영한 기업들도 등장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3월부터 최대 1년간의 자녀입학 돌봄 휴직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3년 도입해 최대 30일간 사용 가능했던 제도를 확대한 것이다. 육아휴직도 법정 기한 1년에서 2년으로 확대 운용 중이다. 할리데이비슨 코리아도 최대 2개월간의 취학자녀 돌봄휴가제를 지난해 도입했으며, 한화케미칼도 입학일 기준 최대 30일간 자녀의 학교생활 적응을 위한 휴가를 낼 수 있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그러나 이런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한 직장은 언제나 그렇듯 남의 직장들. 취학아동을 자녀로 둔 직장맘 대부분에게는 직장이냐 가정이냐의 양자택일만이 남아 있다.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 중인 워킹맘 김모(42)씨는 “첫 아이 때는 육아휴직을 쓸 생각도 못했고, 둘째 아이는 만 6세까지만 사용이 가능해 젖먹이일 때 다 써버렸다”며 “회사의 선의만을 바랄 게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취학 자녀 휴직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
아이가 취학 연령이 될 때까지 경력단절여성이 되지 않았다면, 경제적 이유 외에도 일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3학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맘월드’의 법칙에 따르면 고지가 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눈 앞에 두고 포기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은 왜일까.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아이의 장래를 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아이의 유년기를 황폐한 고독의 유배지로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이 커서다. 맞벌이 가정의 아이는 따돌린다는 온갖 낭설과 괴담까지 심약해진 직장맘을 공격하면 버티기가 힘들어진다. 과연 일하는 엄마는 아이에게 그토록 암적인 존재인 걸까.
지난해 5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캐슬린 맥긴 교수팀이 발표한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에게서 많은 것을 얻는다(Kids benefit from having a working mom)’는 연구 결과를 보자. 모성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 받는 이 연구는 자아실현과 좋은 엄마 사이에서 갈가리 찢긴 워킹맘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4개 선진국(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의 성인 5만명을 조사한 결과, 워킹맘의 딸들이 전업주부 엄마를 둔 또래에 비해 더 높은 급여와 성공적인 커리어, 더 평등한 이성관계를 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워킹맘의 딸들은 전업주부의 딸보다 23% 많은 돈을 벌었고, 관리·감독직을 차지하는 비율도 33%로 전업주부의 딸들(25%)보다 8%포인트 높았다. 24개국 전체 평균을 놓고 보면, 워킹맘의 딸들이 6% 더 소득이 높았고, 관리직 비율은 21%로 전업맘의 딸들보다 3%포인트 높았다.
아들은 어떨까? 아들 역시 일하는 엄마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워킹맘을 둔 남성들은 어른이 돼 자기 가족과 자식을 돌보는 데 주당 16시간을 사용해 전업주부의 아들(8.5시간)보다 두 배 많은 시간을 썼다. 연봉과 직위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들과 딸을 불문하고 이런 차이가 성 역할이 고정화된 국가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일하는 여성이 보편적이고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노르딕 국가들에서는 차이가 가장 적었던 반면 미국이나 이스라엘처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견해차가 큰 국가들이나 러시아나 멕시코처럼 젠더에 대한 태도가 보수적인 국가들에서는 격차가 컸다.
이 연구는 전업주부의 가치와 존재 의의를 폄훼하는 듯 보인다. 전업맘이 자식에게 제공하는 돌봄노동과 정서적 안정감을 단지 롤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단순 상계처리 할 수 있는 걸까. 논문의 주저자 맥긴 교수도 이 점을 우려하며 “이 연구가 모든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거나 집에 머물기로 선택한 엄마들이 딸의 장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들이 집과 직장에서 수없이 다른 선택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알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나중에 살아가면서 선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존중하고, 가능한 많은 옵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이 연구가 밝혀낸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엄마가 직장과 가정 중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아이들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육 수준, 고용 상태, 소득, 기타 인구학적 다양성을 통제했을 때 직장맘과 전업맘의 아이들은 성인이 돼 더 행복하지도, 덜 행복하지도 않은 비슷한 수준의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워킹맘들이 우쭐할 이유는 없다. 미국 에버그린주립대의 스테파니 쿤츠 교수의 뉴욕타임스 기고를 보면, 많은 연구에서 전업주부보다 워킹맘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고 이혼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직장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경제적 이유로 나가야만 하며, 특히 남편이 집안일의 협력자가 아닐 때다. 이 경우 워킹맘의 행복도는 전업주부보다 낮았다. 가장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바로 억지로 일하는 워킹맘이었다.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없는 저임금 직종의 여성이 어린 아기를 둔 경우에도 우울증 위험이 높았다. 하지만 출산 1년간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일하더라도 스트레스가 덜한 일일 때는 단축근무 중인 여성보다 우울증을 덜 겪었다. 결국 엄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대기업 화학계열사에 근무중인 워킹맘 이모씨는 “전업주부도 예전에는 워킹맘이었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간과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1차 관문, 2차 관문에서 자꾸 직장을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를 바꾸지 않고, 전업맘이 낫냐 워킹맘이 낫냐는 소모적인 논쟁만 벌이고 있죠. 워킹맘이 경력을 단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전업맘도 걱정 없이 다시 일터로 나올 수 있도록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자들에게는 한번도 요구되지 않는 가정이냐 일이냐의 선택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요 받으며 싸우지 말고 여자들끼리 힘을 모아 제도를 개선했으면 좋겠어요.” 총선이 코 앞이다. 엄마들이 총궐기해 초등입학 휴직제 의무화의 기치를 높여보면 어떨까. 아빠 의무휴직도 필수로.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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