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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쉬 걸'은 '브리티시 걸'?

입력
2016.03.0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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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니쉬 걸'은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도 영국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UPI 제공
영화 '대니쉬 걸'은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도 영국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UPI 제공

한 프랑스 영화인과 프랑스 단편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집주인의 횡포에 시달리던 젊은 세입자들이 중심에 놓인 영화였다. 세입자들이 단결해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을 유머와 재치로 표현한 영화라 호평을 했다. 프랑스 영화인의 생각은 달랐다. 배우들의 말투가 어색하고 대사가 어설퍼 귀에 거슬렸다며 그리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했다. 관객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열린 제88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겨 준 ‘대니쉬 걸’은 덴마크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화가 부부로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어느 날 인생의 가파른 변곡점을 맞이한다. 여자 옷을 입고 게르다의 모델이 됐던 베게너는 자신의 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여성성을 발견한다. 그는 여자 옷을 입으며 생활하고, 인류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 제목이 ‘대니쉬 걸’(덴마크 소녀)인 이유다. 여자가 되어가는 남편의 곁을 계속 지키는 게르다에게서 보편성과 동떨어진 이질적인 애정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뜻밖의 시련에 대처하는 게르다의 남다른 삶이 스크린에서 빛난다.

세상의 평판을 거부하며 자기 삶을 살다간 남녀의 사연이 아름다운 풍광과 멋스러운 의상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좋은 영화이나 쉬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다.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 영어 때문이었다. 레드메인은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 암시하듯 영국배우다(그가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 청년 마리우스를 연기할 때도 의아했다). ‘대니쉬 걸’이 아닌 ‘브리티시 걸’인 셈이다. 베게너를 흠모하는 게이 산달 역시 영국배우 벤 위쇼(그는 가장 영국적인 영화 ‘007 스펙터’에 출연했다)가 맡았다. 레드메인과 위쇼의 대사에선 높낮이가 명확한 영국식 발음이 묻어났다. 베게너의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인 악스질(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이 등장할 때는 실소할 뻔했다. 매끄러운 영어가 지배하던 스크린에 투박한 벨기에식 영어 발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쇼에나에츠는 벨기에 출신이다.

메가폰은 영국 감독 톰 후퍼가 쥐었고 제작국가는 미국이다. 영화는 기획부터 영어로 꾸며질 운명이었다. 영어가 지구를 지배하는 언어이고, 주요 영화시장인 영어권을 겨냥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덴마크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평가를 할까. 실존 한국인을 중국배우가 중국어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 아닐까.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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