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소비의 시대, 문장 공유하는 사람들
짧은 텍스트와 이미지 공유하고
‘리트윗’ ‘좋아요’로 공감 표시하기
트위터, 인스타그램에서 공유 한창
“텍스트 소비법의 변화” 진단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식을 미리 지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에 실린 ‘꾀병’의 한 구절이다. 공백 포함해서 109자. 시인의 이름과 제목까지 표기하면 135자. 140자 미만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트위터에 맞춘 듯 들어 맞는다.
이 시집은 4만5,000부나 팔리며 우울한 뉴스로 가득했던 2015년 한국 문학판의 거의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판매고가 치솟은 계기는 8월 한 방송에 노출되면서이지만, 그 전부터 SNS에선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시집이다.
지금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선 ‘문장 공유’가 한창이다. 류시화, 이병률처럼 대중적인 시인뿐 아니라 신용목, 황인찬, 김소연, 송승언, 심보선 등 젊은 시인들의 작품도 귀신같이 알아내서 올린다. 백석, 기형도 등 고인은 물론이고 에밀 시오랑, 가라타니 고진, 파스칼 키냐르 등 외국의 시인, 사상가도 상관 없다. 마음을 울리고 의표를 찌르는 한 구절은 ‘리트윗’과 ‘좋아요’를 통해 무한대로 퍼져 나간다. 아예 문장만 전문으로 올리는 계정도 있다. 일명 ‘봇’이라 불리는 이 계정들 중엔 팔로워가 20만 명 넘는 것도 상당수다.
“지금은 짧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시대”
바야흐로 단문의 시대다. 오프라인에선 베스트셀러 목록에 한국 작가 작품이 하나도 없다며 “한국 문학의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SNS를 보면 딴 세상이다. 유명 작가는 물론이고 등단 1, 2년 차 신인 작가들의 글도 꼼꼼히 호명되고 향유된다. 물론 단문의 형태로다.
황인찬 시인은 “지금은 짧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시대”라며 “시는 한 줄 안에 많은 정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SNS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글 안 읽는다고 하지만 매일 스마트폰에서 읽는 글까지 포함하면 아마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텍스트를 소비하는 시대일 거예요. 다만 긴 글을 천천히 사유하며 읽는 것 보단 짧은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 공감을 표하는 걸 더 선호하는 거죠.”
문장에 대한 애정은 단순히 호감을 표시하는 것에서 소장 욕구로 번지고 있다. 최근 나온 ‘원 센텐스’는 스마트폰에 좋아하는 글귀를 저장하고 정리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마음에 든 문장을 직접 입력해도 되고 사진으로 찍어 밑줄을 그으면 해당 문장을 텍스트로 변환도 해준다. 보관된 문장엔 책, 영화, 인물 등의 태그를 달아 보고 싶을 때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사용자들 간에 저장한 문장을 공유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면 사용자의 상황에 맞는 문장을 자동으로 띄워주는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지친 퇴근길에 마음을 위로하는 시구가 올라오는 식이다.
스마트폰이 열어젖힌 단문 시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사람들이 긴 글을 소화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독서 행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퇴화”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황인찬 시인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텍스트 활용 및 소비법의 변화”라며 “긴 글을 읽을 때에만 가능한 사유가 있다면 짧은 글에서만 나오는 사유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 사랑’ 반갑긴 하지만 저작권은?
공유 늘었지만 저작권 인식 부족
무단전재, 상업적 목적 제재법 없고
일부만 인용하거나 맞춤법 오류도
“詩는 공통자산” VS “저작권 개념 필요”
단문의 형태이긴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글이 향유되고 사랑 받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저작권이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것은 국내 모든 문화ㆍ예술 분야의 공통 문제지만 문학출판계는 특히 심하다. 일본만 해도 도서관에서 책이 대출될 때마다 저자에게 일정 금액의 저작권료가 지급되지만 한국에선 대단히 생소한 얘기다.
출판계에선 남의 시를 자신의 책에 재수록할 경우, 편당 시인에게 6만원, 시집을 낸 출판사에 3만원을 지급하는 게 관행이지만 이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형 출판사 중엔 따로 인력을 두고 무단인용 사례를 색출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력이 없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SNS를 통한 시 공유가 늘면서 출판사들에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상업적 목적 없이 단순히 시가 좋아 올리는 것을 향유로 볼 것이냐, 무단 사용으로 볼 것이냐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전자로 보는 경향이 많다. 상당수의 출판사가 SNS 계정을 만들어 자발적으로 시를 올려 홍보하고 있다.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시집 편집을 총괄하는 김민정 시인은 “음악은 틀어 놓으면 귀에 들어가지만 시는 독자가 찾아서 읽지 않는 한 접할 길이 없다”며 “SNS는 원래 시를 찾아 읽지 않던 사람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손쉬운 통로”라고 말했다. 시가 인터넷에 공개됨으로써 시집 판매량이 줄어든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소설은 줄거리를 알면 책을 안 사지만 시는 한 문장에만 ‘꽂혀도’ 책을 산다”며 “실제로 SNS에 시 한 구절을 올리면 어떤 시집에 실린 거냐고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저작권 보호에 아예 손을 놔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문학과지성사 저작권 담당자는 “웹진의 형태를 빌어 인터넷에 시 전문을 무단 전재하는 곳도 많다”며 “전재하는 시의 수가 너무 많거나 상업적 목적을 띤 경우엔 메일로 시를 내려 달라고 하거나 출처라도 밝혀 달라고 요청하지만 뚜렷한 제재 방안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허락 없이 올리다 보니 멋대로 자르거나 맞춤법을 잘못 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영상과 달리 시는 타이핑을 하기 때문에 원본 훼손의 여지가 있다”며 “시는 글자 하나, 문장 부호 하나까지 다 계산된 것이기 때문에 한 군데만 달라져도 그 파급이 다른 장르보다 훨씬 크다”고 우려했다.
음원처럼 ‘詩 다운로드’ 가능할까
지난해 7월 한국문예저작권협회(문예협)가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시(詩) 다운 사이트’에 찬반이 엇갈리는 것도 이런 혼란상을 반영한다. 문예협은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서 음악을 다운받듯 시를 내려 받을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겠다며 “시가 합법적ㆍ체계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돈 주고 시를 내려 받을 사람이 몇이냐 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문예협측은 “인터넷에 시를 게재하는 개인에게 돈을 받기보다 그로 인해 트래픽을 올리는 포털 사이트에 연간 사용료를 받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정달 문예협 사무국장은 “시인들로부터 시를 받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중”이라며 “지금까지 30만 건 가량의 시를 수집했고, 상반기 중 포털 사이트와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정작 저작권 보호에 앞장서야 할 시인들 중 이에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 사용료를 받는 것 보다 자신들의 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편을 선호한다. 함성호 시인은 “출판사로부터 고료를 받은 후에는 내 시가 아니라 모두의 시라고 생각한다”며 “시는 개인의 저작인 동시에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박준 시인도 문학의 “공공적 측면”을 이야기했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시에도 저작권 개념이 필요하겠지만 영화나 음악 등의 콘텐츠를 거래할 때 적용되는 시장 논리를 문학에 그대로 가져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결론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이근혜 문학과지성사 수석 편집장은 “시인들이 저작권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게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라며 “지금은 저작권에 대한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규정을 만들어가는 과도기”라고 말했다. 진은영 시인은 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지적 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시인은 “나도 시 공유에 찬성하는 쪽이지만 스스로 지적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못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표절 사태에서 보여졌듯이 지적재산권에 대한 국내 문학출판계의 인식은 그리 높지 않다”며 “이런 상황에서 시 향유자들에게 지적재산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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