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의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Rebecca Masika Katsuva)는 ‘마마’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콩고전쟁 중 강간 당한 여성과 고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거둬, 치료하고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가르쳤다. 그의 품을 거쳐간 여성만 약 6,000여 명. 아이들의 호칭을 그들이 따라 불렀고, 친해진 뒤로는 이름을 포개 ‘마마시카’라고도 했다. 카추바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어쩌면 더 참혹한 강간 피해자 아니 생존자였다. 콩고의 여성들은 그런 그에게서 용기를 얻고 조금은 덜 힘들게 다시 일어서곤 했다. 콩고의 ‘마마’마시카 카추바가 2월 2일 별세했다. 향년 49세.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면 콩고 현대사를 짧게라도 들춰봐야 한다. 벨기에의 오랜 식민지에서 1960년 독립. 61년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1925~1961) 암살, 미국-소련- 벨기에의 암투와 내전, 1965년 미국을 등에 업은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 집권과 32년 독재(70년 국호 ‘자이레’로 변경), 동쪽 국경 너머 르완다의 94년 내전과 반군들의 콩고 월경, 96년 1차 콩고 전쟁으로 이듬해 5월 로랑 데지레 카빌라(1939~2001)의 ‘콩고민주공화국(DRC)’ 탄생, 1998~2003년 제2차 콩고 전쟁, 전쟁 중이던 2001년 카빌라 암살(사실상 집권세력에 의한 숙청)과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1971~)의 집권.
콩고 전쟁이 내전이 아닌 까닭은 이웃 국가의 무력이 공공연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앙골라와 짐바브웨 우간다 르완다 등 중부아프리카 8개국이 각각 콩고 정부군과 반군을 편들어 벌인 2차 전쟁은, 메들린 울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의 표현처럼 콩고를 무대로 한 ‘아프리카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원인은 구리와 우라늄, 다이아몬드 등 콩고의 자원, 특히 동부 지역에 집중 매장된 콜탄(coltan) 때문이었다. ‘잿빛 골드’라 불리는 분쟁광물 콜탄은 희소원소 ‘나이오븀(Nb)’과 ‘탄탈룸(Ta)’의 원광석이고, 두 광물은 각각 초경합금과 첨단 전자장비의 재료로 쓰인다. 탄탈룸은 전자무기와 스마트폰 노트북 등 IT 장비전자회로와 전지의 필수 광물. 전 세계 콜탄 매장량의 70% 이상이 콩고에 있고, 그 대부분이 동부 콩고, 우간다 르완다 브룬디와 국경을 맞댄 남ㆍ북 키부(Kivu) 주에 묻혀 있다. 콩고의 서쪽 끝 수도 킨샤사의 권력은 동부까지 미치지 못했고, 쿠데타 군은 동부의 자원을 떡밥 삼아 저들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2차 전쟁 희생자는 400만~ 600만 명에 달했고, 집단 학살과 강간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진 민간인이 전투에서 숨진 군인보다 훨씬 많았다. 반군 진영은 광산들을 꿰찬 채 아동ㆍ여성 노동력을 노예처럼 부려 콜탄을 채석했고, 걸러진 탄탈룸은 여러 경로로 팔려나가 ‘세탁’된 뒤 무기로 바뀌어 동부로 되돌아왔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곳도 당연히 동부 키부지역. 카추바가 나고 자라고 결혼해 살던 곳이 거기였다.
카추바는 1966년 5월 26일 남키부 주 카타나(Katana)에서 태어났다. 처음 얻은 이름은 레베카(Rebecca)였지만, 독재자 모부투가 아프리카민족주의를 선언하며 국호를 바꾸고 서양식 이름을 불법화하면서, 그는 마시카가 됐다. 오퍼상이던 보스코 카추바(Bosco Katsuva)와 결혼한 해는 분명치 않다. 카추바는 남편이 두바이 등지를 다니며 떼온 생활용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했다. 부부는 꽤 넉넉한 생활을 했고, 2차 전쟁이 발발하던 98년 무렵 그들에겐 네 딸이 있었다.
무장 반군이 들이닥친 건 그 해 10월 어느 밤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프런트라인(FrontLine)이 펴낸 책자에 카추바가 직접 쓴 수기 일부다.
“밤 11시경 모든 게 시작됐다. 남편과 네 아이, 내 여동생과 나. 이웃집서 비명이 들렸지만 도망갈 데가 없었다. 마을 한 쪽은 야수들이 사는 정글이었고, 다른 쪽은 강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들이닥쳤고 모든 걸 강탈했다.(…) 죽이려면 총으로 죽여 달라는 남편을 조롱하며 그들은 ‘(칼로) 조각조각 내 죽여주겠다’고 했다.(…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남편의 토막 난 시신을 내게 한 데 모으게 한 뒤 그 위에 나를 눕혔다.(…) 12명째에 이를 무렵 옆 방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15살, 13살(9살 13살이란 기록도 있다) 딸과 내 어린 여동생의 목소리였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6개월 뒤 병원에서 깨어난 카추바는 제 상처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두 딸의 임신해 부른 배를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남편 가족들이 집을 팔아 치워 돌아갈 곳도 없었다. 남편 형제들은 카추바에게 강도들과 내통해 남편을 죽게 한 것 아니냐고도 했고, 정 들어와 살려면 시동생과 다시 결혼하라고도 했다. 카추바는 옷 가방 하나 들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그가 아들을 못 낳아서 쫓겨났다는 기록도 있고, 마을 인근 교회 근처에서 노숙하던 그가 성가셔 남편 가족들이 차비를 주어 멀리 쫓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든 전쟁이 그렇지만 콩고 전쟁에서 강간은, 반군 정부군 할 것 없이, 전투의 한 방편처럼 일상적으로 자행됐고, 남성 피해자도 적지 않았다. 훗날 카추바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Seeds of Hope’)로 만든 피오나 데비(Fiona Davies)는 “전쟁이 치열했던 무렵에는 동부 콩고에서만 매 시간 48명이 강간 당했다는 추산도 있다”고 썼다.(pulitzercenter.org, 2016.2.4) 영국 옥스퍼드에 본부를 둔 국제 빈민인권기구 옥스팜(OXFAM) 홈페이지에는 그들이 조사한, 읽기조차 고통스러운 콩고의 강간 사례들이 소개돼있다. 아내와 딸을 집단 강간한 뒤 남편에게 딸을 강간하도록 강요하고, 불응하자 남편과 세 아들을 살해한 이야기, 반군에게 끌려가 7개월 동안 성 노예로 지내다 탈출한 사연…. 한 여성은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지네타 사강 기금(Ginetta Sagang Fund)’의 안드레아 클라번(Andrea Claburn) 이사장은 “콩고 전쟁은 여성과 청소년 아동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amnestyusa.org, 2010.4.13)
카추바는 2000년 무렵 북키부 주 고마(Goma) 시의 한 국제인권단체가 운영하던 ‘Isle Africa’라는 강간피해여성들의 의료 쉼터 일을 도왔다. 피해 여성들을 데려와 치료받게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자신의 사연은 감춘 채 그 일을 시작했던 그는 훗날 강간 후유증을 못 견뎌 제 사연을 털어놨고, 그들의 도움으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다.
옥스팜에서 받은 돈 250달러로 그는 독자적인 강간 피해여성 자활운동을 시작했다. 가족으로부터 쫓겨난 그들을 모아 함께 지내며, 사연을 듣고자 하는 유엔과 국제인권단체를 연결시켜 주는 일(그의 집은 ‘경청의 집 Listen House’이라 불렸다). 기부금이 모이면 인근 땅을 사서 함께 농사짓고 수확물을 판매하며 자활 공동체를 구축해나갔다. 어느 마을에 반군이나 정부군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는 열일 제쳐두고 찾아가 오갈 데 없는 이들과 아이들을 데려오곤 했다. 카추바는 “그들에겐 각자 특별한 사연과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함께 사연을 듣고 토론해서 해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면 부족 어른들을 찾아가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 공동체를 ‘버려진 이들의 자활연대협회’(APDUD)로 개편했고, 그렇게 점차‘마마’가 돼갔다.
국제인권단체가 그를 지원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전시성폭력피해자 지원ㆍ연대 기금인 ‘나비기금’의 2012년 첫 지원 대상도 APDUD였다. 여성들의 집은 50채 가량으로 늘어 거의 마을공동체가 됐다. 그곳에는 평균 150~200명 가량의 여성들이 생활했고, 아이들만 84명(2015년 2월 기준)이 있었다. 해외의 지원이 넉넉했을 리 없다. 카추바를 돕던 이들이 “이제 한계 상황”이라고, “그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유하자 그가 “어떻게 아이들을 길바닥에서 죽게 내버려둬”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한다.(pulitzercenter, 위 글) “내가 아이들에게서 얻는 게 있다”고, “아이들이 나를 안정시켜준다”고 그는 말했다. 피오나의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병원에 데려가는 뭉클한 장면들이 나온다. “나 역시 죽을 마음을 여러 차례 먹곤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는 내 도움을 원하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본다.”(AI, 위 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중재와 분쟁광물 무역규제 등에 떠밀려 콩고 정부군과 반군은 2003년 휴전했다. 하지만 동부는 지금도 사실상 반군 수중에 놓여 있고, 분쟁과 강간도 지속되고 있다. 옥스팜은 2004~2008년 사이 남키부 주 유일한 산부인과 병원인 판지(Panzi)병원에서 진료받은 강간 피해자 9,709명 가운데 4,311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2010년 4월 공개했다. 피해자는 대부분(56%) 들판(16%)이나 숲속(15%)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밤중에, 다시 말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 당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이는 1%가 되지 않았고, 세 명중 한 명은 혼자 왔고, 절반 이상은 강간 당한지 1년이 지난 뒤에야 질병 등 후유증 때문에 온 이들이었다. 휴전 뒤 민간인에 의한 강간 범죄도 저 4년 사이 무려 17배나 증가했다. 2004년 1% 미만이던 민간인 강간 비율은 2008년 전체의 38%였다.
카추바도 2006년 이후 무려 3차례나 더 집단강간을 당했다. 2009년 1월 강간은 카추바가 군인들의 강간 사실을 고발ㆍ폭로해온 데 대한 보복ㆍ협박 강간이었다.(가디언, 2016.2.9) 카추바의 어머니도 그의 일을 돕다가 강간ㆍ살해 당했다.
2010년 4월 마시카 카추바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지네타 사강’ 상을 수상했다.(지네타 사강은 이탈리아 출신 미국의 양심수인권운동가. 2000년 작고) “끊임없는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폭력 생존자와 청소년,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돌본”공로였다.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열린 시상식에 그는 불참했지만, 국제사면위원회 미국지부 수잔느 트리멜(Suzanne Trimel)은 카추바가 상금 1만 달러를 어떻게 쓸지 궁리 중이었다고 전했다. “돈을 집에 둘 수 없으니 우선 은행에 넣어두려고 한다. 나중에 고마에 집을 한 채 사서 세를 놓을 생각이다. 아이들의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남으면 그 아이들과 여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쓸 거다.” 그에겐 함께 돌보는 아이들 외에 입양한 고아 18명이 있었다.
콩고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인권운동가 바바 탐파(Vava Tampa)는 가디언 기고문에서 작년 말 카추바는 재봉틀을 구해 달라고 했다고, “다섯 대가 있었는데 3대는 망가지고 하나는 도둑맞았다”고 했다고, 몇 달 뒤에는 또 “수확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가려면 밴 한 대가 있으며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여성과 아이들과 마을 살림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못 챙겼던지, 카추바는 2월 2일 오전 8시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4시에 숨졌다. 사인은 말라리아 합병증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였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콩고 담당 선임연구원 이다 소여(Ida Sawyer)는 “카추바가 떠난 뒤 세상이 더 황량해진 것 같다”고 HRW 홈페이지에 썼다. 그는 “카추바 덕에 모진 일을 겪었던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자신들도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됐고, 또 힘을 얻었다”고, “ 내 삶도 그를 알아 더 풍요로워졌다”고 추모했다. 유엔 사무총장의 분쟁지역 성폭력 특별대표 자이납 하와 방구라(Zainab Hawa Bangura)는 지난 5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마시카는 영웅(heroine)이었다(…) 그 어떤 야만도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 이길 수 없음을 그는 내게, 이 세계에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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