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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와 개발주의가 낳은 비극 '무등산 타잔'

입력
2016.03.0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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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무등산 타잔, 박흥숙’편에서 소개된 박흥숙의 모습.
2005년 5월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무등산 타잔, 박흥숙’편에서 소개된 박흥숙의 모습.

박흥숙은 1977년 4월 20일 무등산 덕산골에서 네 명을 살해했다. 그들은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기 위해 나온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들이었다. 박흥숙은 살인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삼 년 동안 수감되다 1980년 12월 24일 형 집행을 당했다.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 해 겨울, 광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무등산 타잔’이라 불렀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무등산을 날다시피 오르고” “마치 이소룡과 같은” 강한 무술가로 묘사됐다. 실제로 그는 강골이긴 했지만 왜소한 축이었다. 날쌔게 산을 탈 수 있었던 이유는 골짜기 깊숙한 곳에 토막을 짓고 살 수 밖에 없었던 형편 때문이었다. 대단하다고 알려진 무술 실력 역시 굶주려 약해진 몸을 단련하기 위해 운동에 힘썼던 결과가 부풀려진 것이다.

살인 행위는 결코 옹호될 수 없지만 박흥숙 사건은 실상 무리한 철거 집행으로 터전을 잃어버린 빈민이 극단적으로 저항하다 발생한 참극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비참하게 내쫓긴 철거민의 실상은 감추고 ‘사제총’과 ‘해머’ 등 자극적 소재만을 앞세워 그를 극악한 살인범으로 연출했다. 으레 그렇듯 검거 후에는 용공 혐의마저 추가했다. 무속인들 뒤치다꺼리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의 어머니에게는 미신 풍습이라는 전근대적 야만성을 덧씌워 “무당골”의 “타잔 박흥숙”이란 괴물을 만들어냈다.

“가난하면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박흥숙 사건은 유신정권 말기의 도시빈민 거주 문제와 무분별한 도시 재개발 정책, 관료들의 전시 행정 야욕이 겹쳐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였다. 1960년대 말부터 경부고속도로를 축으로 삼아 수도권과 영남의 성장은 급속도로 진행됐지만 그 외 지역은 소외됐다. 유신 직후 호남의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박 정권은 허울뿐인 개발 공약을 남발했다. 1972년 발표한 ‘무등산 도립공원 지정’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섯 해가 지나도록 개발 성과는 전무했다. 박 정권은 겉으로는 호남 지역의 개발 이슈를 부각시키면서도, 뿌리 깊은 정치 문화적 차별은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유신말기 정부는 또 다른 개발 사업을 미끼로 민심을 회유했다. 1977년 광주에서 열릴 전국체전을 앞두고 방치됐던 무등산 개발 사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곳곳에 경기장을 짓고, 등산로에는 케이블카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권은 민심 이반을 되돌리기 위해 시혜적 개발 정책을 내놓곤 했다.

그때 무등산 자락에는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박흥숙이 1974년부터 살기 시작한 토막에도 이 무렵부터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무등산 일대의 경관개선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20여 호가 모여 살던 빈민촌에 여덟 가구만 남게 되었을 때, 그도 이제 곧 덕산골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친 1977년 4월 그날, 박흥숙은 집행에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그런데 철거반원들은 가재도구를 끌어낼 시간도 주지 않고 집에 불부터 놓았다. 어머니는 당시 어렵게 모은 돈 30만원 전 재산을 천장에 숨겨 놨었다. 그녀는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실성해 돈을 꺼내려 달려들었다. 철거반원들이 그녀를 막아서 넘어뜨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흥숙은 어머니를 타이르며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저들을 원망하지 말자고 말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 위쪽 골짜기에 늙고 병든 부부의 움막이 있는데, 그 집만은 불태우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철거반원들은 “젊은 놈이 가만 놔두니 계속 나선다”며 윽박지르고 그 집에도 불을 질렀다. 살아남은 철거반원이 후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전국체전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박 대통령의 헬기 순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무등산 일대를 지날 수 있으니 경관을 해치는 무허가 주택을 일소하라는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분노한 박흥숙은 사제총을 꺼내 위협한 뒤 그들을 포박했다. 처음에는 겁을 냈지만 이내 함부로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된 철거반원들은 스스로 포승을 풀며 “어쩔셈이냐”며 또 다시 그를 자극했다. 집을 불태운 것과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조롱당했다. 참다 못한 그는 “가난한 사람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절규하며 철거반원들의 머리를 쇠망치로 내리쳤다.

가난과 공부, 그 모순과 아이러니

전남 영광 태생인 박흥숙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학업 성적만은 최우등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이후 중등 입학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내장산의 절로 들어가 불목하니로 지내며 연명했다고 한다. 그는 광주로 올라가 열쇠수리공이 됐다. 사건 당시의 사제총도 이때 익히고 배운 철공기술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가족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그의 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내에는 함께 모여 살만한 집이 없었다. 그는 무등산으로 들어가 직접 집을 짓기로 한다. “돼지 움막보다 못한” 토막이었으나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60일 동안 맨손으로 집을 짓느라 손이 부르텄으나 연고도 바를 처지가 못 됐다.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했다. 주경야독이었다. 가난 때문에 중단한 공부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검정고시를 다섯 달 만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을 치겠다고 결심한다. 대한민국의 법이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법관이 돼 약자를 돕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법 공부는 치열한 독학이자 고학이었지만 그 날의 사건 때문에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법전을 외고 적으며 공부하는 동안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 수감기간 동안 그가 남긴 회고록은 그의 곧고 정한 성품을 고스란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70년대 철거민의 생생한 분노와 정의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는 진귀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박흥숙 현장 검증 장면.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료 사진.
박흥숙 현장 검증 장면.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료 사진.

분노와 파국, 도시빈민 문제의 사회화

그의 법 공부가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자명하다. 그에게 법이란 국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는 도구이자 약자를 대변하는 수단이었다. 부조리로부터 가족과 이웃을 보호하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했다. 집이 불타고, 전 재산을 잃게 된 순간에도 그는 법이 공정하게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가 철거반원들을 포박한 것도 강제집행을 멈추고 함께 시청으로 찾아가 집을 소각한 것이 정당한 행위인지를 따져 묻고자 함이었다.

그의 공부가 힘 세고 돈 많은 이들처럼 되는 길이었다면 살인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범행 직후 이틀 동안 도망을 다니면서 우연히 만난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기 위해 스스로 중앙정보부를 찾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간첩 신고를 하기 위해 자수를 한 꼴이다. “사회질서를 파괴한 잔혹한 살인마” 박흥숙이 그간 익히고 배운 상식과 교양이란 역설적이게도 지배권력이 주입한 규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교과서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구조적 모순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초졸 학력의 열쇠수리공이 차별과 불평등을 공적 담론으로 발화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이치를 실천하기 위해 치열하게 법을 공부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국가의 폭력이 가해졌을 때 그는 결국 분노를 폭발시켰다. 꾸준한 그의 공부가 단호한 사회적 저항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날의 파국은 유신독재의 민낯과 개발주의의 부작용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로선 철거민의 주거 권리란 매우 생경한 것이었는데 박흥숙 사건이 도시빈민 문제를 사회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공부가 끝내 제대로 쓰이지 못한 사정이야말로 시대의 비극이자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 사이의 결렬을 보여주는 씁쓸한 자화상이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더 지난 후에 벌어진 2009년 용산 참사는 우리들이 여전히 박흥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강부원 성균관대 국제한국학센터 연구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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