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이한테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꺼낸 적이 없어요. 저희는 지금 사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열두 살 이리나 시텐코바양의 어머니는 딸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100㎞ 남짓 떨어진 벨라루스의 부다 코샬레바. 여기서 만난 시텐코바양은 구순구개열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또 쉽게 피곤해지고, 매달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잔병치레가 잦아 한 해 늦게 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친가와 외가 모두 체질이 건강한 편이다. 다만 애 아빠가 체르노빌 사고로 심하게 오염된 이곳, 부다 코샬레바 출신”이라고 했다.
이 지역 비영리단체 ‘체르노빌의 아이들’에 따르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전에는 구순구개열 장애아동이 지역 내 한 명도 없었다. 구순구개열은 서양보다 동양에서 흔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세계적으로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러나 부다 코샬레바에서는 사고 뒤부터 발견되기 시작해, 현재 8명의 아동이 같은 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 최악의 원전사고가 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 고통이 사라지기는커녕, 세대에 걸쳐 대물림되고 있다고 이 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을 잃은 아이들
국제단체 ‘체르노빌의 아이들’ 홈페이지에는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부고가 올라온다. 모두 체르노빌 사고 영향으로 선천적 질병을 갖고 태어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다.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또래보다 훨씬 몸집이 작고, 생전에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는 점은 같다. 이 단체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 등 체르노빌 사고로 집중 피해를 입은 지역의 아동 80%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고 있다. 단체는 또 우크라이나에서 매년 약 5,000명의 태아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난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국제사회와 정부 당국이 공식 인정한 것은 방사성 요오드 노출로 인한 갑상선암뿐이다. 이는 사고 뒤 4~5년이 지나 어린이와 청소년층에서 눈에 띄게 발병률이 증가했다. 뒤늦게 발견된 건 그전까지 제대로 모니터링이 이뤄지지 않았던 탓이 컸다. 갑상선암은 1995~96년 어린이, 청소년 환자수가 사고 이전에 비해 최고 39배에 이르는 등 피폭과 상관관계가 가장 뚜렷한 질병이다.
반면 백혈병이나 다른 희귀질병은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피폭이 그 원인이라고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각종 연구자료 및 통계를 통해 체르노빌 사고 뒤 다양한 질병이 세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 테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체르노빌 사고 25주기에 발간한 보고서조차 “피폭자 2세들에게서 발병률 및 유병률이 일반아동보다 높다”고 지적한다. 또 2009년 등록된 환아가 1992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질환별로 나누면 ▦내분비계는 11배 ▦근골격계는 5배 ▦소화계 5배 ▦정신 및 행동장애 4배 ▦심혈관질환은 4배 더 많았다.
통계보다 실상은 더욱 참혹하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방문한 비영리단체 ‘젬랴키’는 오염지역 출신이나 원전노동자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크라시스카야 타마라 대표는 “2000년대 들어 태어난 아이들 중 다운증후군, 걷지 못하거나 말을 못하는 아이, 아예 얼굴 없이 태어난 아이도 있다”며 “부모가 병으로 죽은 경우도 있어 이처럼 치료비 마련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전세계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1989년 부다 코샬레바에 비영리기구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설립한 발렌티나 스몰니코바 대표도 “사고 이전 이곳 아이들에게서 종양이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뇌종양, 안암, 신장암 등 다양한 암이 발병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사고 초기에는 골암이나 피부암이, 몇 년 지나서는 갑상선암과 백혈병 환자가 늘어갔다. 이제는 이 지역에서 열에 한 명 정도가 건강하게 태어날 뿐, 대다수가 면역력이 낮고, 각종 만성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도 했다.
해외로 요양가는 아이들
이리나 시텐코바양은 열 살 때부터 아일랜드와 독일 두 곳을 혼자 다녀온 경험이 있다. 체내 방사능 수치를 낮추기 위해 청정한 나라로 이른바 ‘요양 여행’을 간 것이다. 그는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아일랜드에서 줄지어선 나무들을 보니 신기하고 좋았다. 바다에서 처음으로 수영을 해본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며 활짝 웃었다.
아직도 국토 상당부분이 세슘 등의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벨라루스의 아이들에게는 이 같은 ‘요양 여행’이 흔하다. 행선지는 벨라루스 북쪽 지역부터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에 한정돼 있다. 과거에는 히로시마 원폭 경험으로 강한 연대감을 표하던 일본도 포함됐지만 후쿠시마 사고 뒤부터 그 길은 막혔다.
물론 벨라루스 일반 가정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국제사회 도움을 받는 비영리단체들이 주축이 돼 현지 가정과 아이들을 연결시켜주고, 항공료 및 일체 비용을 부담한다. 한 번 다녀온 뒤부터는 현지 가정이 자부담으로 아동들을 재초청할 수 있어 여러 번 같은 곳을 다녀온 아이들도 많다. 또 의사와 통역까지 동행하는 ‘요양 캠프’도 있는데, 이는 단순히 현지에 머무는 것 외에 치료에 초점이 맞춰진 체계적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깨끗한 음식을 먹고, 공기를 마시는 것 자체가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되겠지만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자유롭게 바깥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호응도는 높은 편이다. 2년 전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요양을 다녀온 스비야토슬라브(15)군은 가기 전 750베크렐이던 체내 세슘 수치가 100베크렐로 줄었다. 선천성 천식을 앓고 있는 그는 “공기가 맑아 숨쉬기가 편했다”며 “반 친구들 대부분이 이런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후쿠시마도 체르노빌을 닮아간다
재앙으로부터 5년. 후쿠시마 아이들도 아프다. 체르노빌 아이들이 그랬듯이 사고 직후부터 두통이나 심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많다. 갑상선암 발병 및 의심환우도 급격히 늘었다.
지난해 10월 오카야마 국립대 쓰다 도시히데 교수팀은 기자회견을 열고, 2011년 10월부터 2015년 3월까지 후쿠시마에 거주하는 청소년 갑상선암 검진 결과를 분석한 결과 이들의 발병률이 일본 평균보다 20배에서 최대 50배까지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후쿠시마 내 검진이 늘어나 발병 사례도 많은 이른바 ‘스크리닝 효과’라고 항변했지만 츠다 교수팀은 “스크리닝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높은 수치”라며 “후쿠시마 결과는 체르노빌 사고 4년 뒤 벨라루스의 갑상선암 발병률과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비만도 문제다. 지난해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조사에서 후쿠시마 9세 아동의 15.07%가 비만으로, 전국 평균(8.14%)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외에도 6, 7, 11, 12, 13세 아동들이 다른 지역보다 뚱뚱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쿠시마가 위치한 도호쿠 지방은 유난히 추운 겨울 탓에 실내활동이 많아 다른 지역 아이들에 비해 살찐 경향이 있었지만, 이 비율은 후쿠시마 사고 뒤 급격히 증가했다. 공기 중과 토양 표면 등에 남아있는 방사성 물질 탓에 바깥활동을 자제해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체르노빌에서 배운 것일까. 후쿠시마에는 일찍부터 ‘요양 여행’이 생겨났다. 오키나와, 홋카이도, 오사카 지역 등으로 아이들을 보내 흙을 밟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후쿠시마 아이들을 수용하는 시설 가운데는 과거 벨라루스 아이들을 받았던 곳도 상당수다. 한 시설 관계자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받으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통해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식품을 제공하고 있다”며 “3ㆍ11 원전사고 이후 후쿠시마뿐 아니라 도쿄에서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세월이 흘러도 방사능의 공포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은 오염된 땅, 그리고 그 땅에서 생산된 식품으로 인한 피폭 때문이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발렌티나 스몰니코바 대표는 “사고 뒤 반경 30㎞ 내를 강제피난구역으로 지정했지만 많은 지역이 그 밖에 있어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며 “(부다 코샬레바의 경우) 10년이 지나도 자체 측정 결과 규정치 아래로 제염된 곳이 한 곳도 없었고 그 결과 지역 생산물을 먹었던 사람들은 내부피폭을 피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벨라루스는 연간 피폭허용량이 1msv인데 일본은 20msv로 매우 높다. 더구나 겨우 4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피난민들을 돌려보내고 있다”며 우려했다. 그는 아베 일본 총리가 후쿠시마 농산물이 안전하다고 주장한 뉴스를 보고 놀라 ‘체르노빌의 아이들’ 이름으로 말도 안 된다는 항의서한을 보냈다고도 했다.
스몰니코바 대표의 말처럼 후쿠시마의 상황은 어쩌면 체르노빌보다 훨씬 암담할지도 모른다. 후쿠시마 땅 곳곳에 방사성 폐기물을 담은 검은 자루들은 갈 곳이 없다. 중앙정부가 둘 곳을 정하더라도 지방정부 및 지역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어서다. 후쿠시마 사람들은 제염작업이 끝난다 해도 학교와 집, 논밭을 가리지 않고 쌓여있는 이 자루들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후쿠시마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 ‘다라치네’ 소속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인 노자키 아유미씨는 “후쿠시마에 살고 있지만 후쿠시마산 음식은 일절 사지 않는다”며 “정부가 안전하다고 하는 지역도 직접 측정해보면 주변에 핫스팟(방사선 수치가 높은 지점)이 종종 발견되는 만큼 아이들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후쿠시마 내 고등학교에서 이론과 실기수업을 병행해 원전 내에서 일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폐로까지 30~40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후쿠시마가 더 절망적인 것은 아이들이 커서 결국 원전이나 제염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라고 강조했다.
부다 코샬레바에서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방문했을 때 스몰니코바 대표는 인터뷰에 앞서 정찬을 준비해 취재진에게 권했다. 지역식품으로 만들었지만 자체 개발한 경작 및 조리법으로 방사능 수치가 매우 낮은 밥상이라고 했다. 가령 음식에 대한 세슘 기준치는 ㎏당 100베크렐이지만 상 위의 양배추는 7베크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단체는 음식으로 인한 내부피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백서를 소형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는 한편, 체르노빌을 겪지 않은 젊은 임신부 등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그는 “방사능과 같이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고 교육하는 일”이라며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 때문에 정부의 압박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는 국제사회와의 연대로 풀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ㆍ후쿠시마=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다무라 히사노리 기자 hisanori.ymr@hotmail.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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