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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완성은 성공?…실리콘밸리 천재는 'IT시크'를 입는다

입력
2016.03.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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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 차림의 이세돌(왼쪽) 바둑기사와 캐주얼한 후디 차림의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 IT천재들이 만든 건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패션코드 'IT시크'도 유포시키고 있다. 구글 제공
수트 차림의 이세돌(왼쪽) 바둑기사와 캐주얼한 후디 차림의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 IT천재들이 만든 건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패션코드 'IT시크'도 유포시키고 있다. 구글 제공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마침내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를 꺾은 날. 한 장의 사진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가 두 손으로 이 9단의 손을 꼭 쥔 채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승리와 패배를 대하는 인간 태도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한 장면이라 부를 만한 사진이었지만, 수트 차림의 이 9단과 덥수룩한 머리에 회색 후디(모자 달린 캐주얼 재킷)를 입은 브린의 대조적 차림새도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뤘다. ‘다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격식을 갖추어 옷을 입어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강고한 규율은 이 순간,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 IT업계가 세계에 끼친 영향은 비단 인터넷과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면 티셔츠ㆍ청바지ㆍ스니커즈 ‘IT 시크’

주기적으로 세계 패션계를 호령하는 프랑스의 패션 코드는 ‘프렌치 시크’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의미의 이 말은 공들여 꾸민 것 같지는 않지만, 온 몸에서 세련됨이 뿜어져 나오는 차림새를 말한다. 방금 미용실에 다녀온 듯한 머리,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거친 것 같은 화장, ‘신상’으로 빼 입은 듯한 옷차림을 비웃는 듯한 뉘앙스의 용어다. ‘나 멋 부렸어요’가 가장 멋없다는 이 프랑스적 애티튜드의 단어는 이제부터라도 멋쟁이가 되고 싶은 패션 입문자에게는 들을수록 신경질이 나는 말이기도 하다.

테크 유니폼을 재해석한 막스 마라의 지난해 ‘기키 시크’ 컬렉션.
테크 유니폼을 재해석한 막스 마라의 지난해 ‘기키 시크’ 컬렉션.

프렌치 시크를 실리콘밸리가 재해석한 걸까. 감지 않은 머리, 밀지 않은 수염, 갈아입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면 티셔츠와 바지, 무심하게 걸친 후디…. ‘패션의 교황’ 칼 라거펠트가 마주쳤다면 준엄하게 꾸짖었어야 마땅한, ‘패션’이라 부를 수 없는 이 패션은 그러나 이제 엄연한 패션코드로 자리잡았다. ‘테크 유니폼’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획일적인 패션코드로 시작했지만,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런웨이에서도 뿔테 안경에 회색 면 드레스, 굽 낮은 로퍼를 신은 ‘기키 시크 룩(geeky chic look)’의 모델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괴짜를 뜻하는 ‘긱(geek)’과 ‘공부 잘하는 얼간이’를 일컫던 ‘너드(nerd)’는 실리콘밸리의 IT 벤처기업가들 덕분에 제2의 긍정적 의미항을 사전에 추가 등재했다. ‘컴퓨터밖에 모르는 괴짜 천재.’ 그 앞에 ‘패션 따위는 관심도 없는’이라는 의미가 괄호 안에 묶여 있지만, 이제는 패션에 대한 그 태도마저 하나의 패션이 돼 ‘너디 시크’, ‘기키 시크’ 등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테크룩’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차림새일까. 웹 테크놀로지 블로그인 ‘리드라이트(ReadWrite)’가 시각화한 ‘테크 유니폼’에 따르면, “머리는 ‘나 방금 일어났어요’ 스타일에, 수염은 턱수염 중심으로 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면 티셔츠에 바지는 진한 워싱 청바지를 입는다. 티셔츠 위에 걸치는 후디는 회사 로고가 박힌 걸로 입어 미묘하게 ‘나는 중요한 일 하는 사람’임을 알린다. 신발은 스니커즈를 신는데, 달리지는 않아서 흙 같은 건 안 묻어 있다.” 여성의 상투적 패션코드에서 ‘명품백’의 위상을 차지하는 건 손목에 찬 각종 웨어러블 기기. 애플워치부터 페블워치, 핏빗 만보계까지 각종 스마트워치가 필수다. 접이식 자전거 픽시, 다양한 IT기기들을 담고 다닐 메신저백, 테이크아웃 커피도 빼놓을 수 없다.

<참조: IT 블로그 '리드라이트'의 '테크 유니폼'> 삽화 박구원기자
<참조: IT 블로그 '리드라이트'의 '테크 유니폼'> 삽화 박구원기자

젊음과 성공에 대한 숭배가 ‘IT 시크’ 낳아

그렇다면 한국의 IT맨들은 어떨까. 국내 대표적 IT기업인 A게임개발업체와 B전자기업의 직장인에게 출근 옷차림에 대해 물었다. A사는 스트라이프 남방이나 면티에 회사 후디를 입고,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 대신 크록스를 신는 게 ‘교복 차림’이라고 했다. B사는 흔히 ‘폴로 셔츠’라고 부르는 칼라 달린 면티 ‘피케 셔츠’에 ‘베이지색 면 바지’가 유니폼이라고 한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유니폼보다 조금 더 격식을 갖춘 차림새지만,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왜일까. 이런 옷은 입기만 하면 창의성이 봇물 터지듯 절로 터져 나오는 걸까.

대기업 엔지니어로 일하는 김모(35)씨는 “꾸미고 차려 입는 데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종종 TPO(time, place, occasion)를 거부하는 게 ‘있어 보이는’ 줄로 착각한다고 비판을 해요. 공연장이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처럼 격식을 차린 복장이 어울리는 장소에서도 낡은 맨투맨 셔츠나 라운드티, 후디를 고집하거든요. 그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꾸민 듯한 복장은 오히려 '나는 이날 이 순간을 고대해왔다'고 써 붙인 것 같지 않나요? 아무거나 꺼내 입었지만 적당히 단정한 수준의 캐주얼이 어디서든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남자들을 봐도 수트를 쫙 빼 입은 사람보다 편안한 캐주얼을 입고 있는 게 가장 있어 보이더라고요.” 유행하는 가방이나 브리프케이스조차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 자동차 키는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에게 아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나에겐 이 비싼 식당이나 동네 슈퍼나 아무 차이 없는 장소일 뿐’ 그런 쿨함을 뽐내고 싶은 거겠지.”

리드라이트는 ‘실리콘밸리 룩은 진짜 실리콘밸리 옷차림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스테레오타입화된 차림새에 숨은 젊음의 성공신화를 지적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 스타트업 기업가는 ‘캐주얼 아카데믹 드레스’를 일터로 들여온다. 젊은 창업자에 대한 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래픽티셔츠와 카고팬츠를 입은 사장님의 이미지는 기업 전반에 하나의 풍조로 퍼진다. 동업자와 투자자들이 이 드레스코드에 가세하고, 신입사원은 당연히 거부할 수 없다. 영화와 드라마의 시각적 재현도 시시때때로 이뤄진다. 회사가 대형강의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실리콘밸리 시크'의 전도사들. 왼쪽부터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대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대표, 작고한 스티브 잡스 전 애플 대표.
'실리콘밸리 시크'의 전도사들. 왼쪽부터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대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대표, 작고한 스티브 잡스 전 애플 대표.

패션의 완성은 얼굴도 몸도 아닌 성공?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구를 창조해내겠다는 지적 의지와 검박한 삶의 태도는 일종의 패키지로 인간의 뇌내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전의 기미가 없는 만성적 경제위기가 패션에 대한 근원적 피로를 촉발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평범한 ‘놈코어’ 코드의 강력한 위력도 ‘IT시크’와 접속된다. 테크업계의 옷차림이 멋있다고 생각하든, 멋없다고 생각하든, ‘IT시크’가 기술만능시대의 의미망 속에서 강력한 패션코드로 자리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옷차림을 소개하는 미국 대중 언론 기사의 제목은 언제나 ‘실리콘밸리 엘리트처럼 입는 법’이다. 테크 유니폼을 입은 채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IT’와 ‘실리콘밸리’가 생성하는 의미망이 얼마나 강력한 지 금세 알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벌거벗은 채 태어난다. 그 위에 걸친 모든 것은 문화적 산물이다. IT맨들이 면티와 후디를 입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 같은 건 없다. 스티브 잡스도 애플 초창기의 신제품 프리젠테이션에는 수트 차림으로 등장하곤 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을 위해 방한한 61세의 에릭 슈미트 알파벳 회장은 여전히 넥타이에 수트 차림이었다.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대표도 면티 외에 근사한 수트 차림을 자주 선보인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세계로 뻗어나간 ‘테크룩’은 철저히 세대적·사회적·문화적 산물이다.

스티브 잡스가 살았고, 마크 저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 등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실리콘밸리 팔로 알토 지역에는 착륙 임박 소문만 무성한 에르메스 매장이 아직도 들어서지 않았다. 지난해에야 이자벨 마랑을 비롯한 럭셔리 브랜드들의 상점이 하나 둘 입점 준비를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럭셔리 마케팅 위원회의 앨프 누시포라 위원장은 패션지 ‘패셔니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여기 부자들은 전통적으로 집이나 여행, 외식 등에 돈을 쓴다. 부의 소비가 매우 조용하게 이뤄지고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럭셔리의 기준도 달라서 이곳의 럭셔리 카는 벤츠가 아니라 테슬라다. 실리콘밸리 패션 위크가 지난해 처음으로 열리는 등 패션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숨겨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지표들이 나타나고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는 요가복으로 유명한 룰루레몬의 레깅스, 수트가 필요한 남성에게는 중간가격대 미국 브랜드인 브룩스 브라더스가 유니폼”이다.

패션을 인간의 옷에 대한 태도라고 할 때 실리콘밸리의 부자들은 ‘패셔너블하다’라는 단어의 전통적 의미를 전복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갭 티셔츠를 입는 게 아니다. 에르메스 셔츠가 아닌 갭 면티를 선택한 이유가 더 패셔너블하게 느껴진다. 이제 패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패셔너블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가장 패셔너블한 역설. 놈코어의 극단적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자수성가한 거부’의 이미지를 배면에 깔고 있는 ‘실리콘밸리 시크’는 패션의 완성이 얼굴에서 몸으로, 몸에서 ‘성공’으로 이양되는 과정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패완얼’도, ‘패완몸’도 무릎을 꿇리는 성공의 마력. 면티, 후디, 성공적.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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