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이케이도 준의 2011년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변두리 로켓’이라는 소설이 있다. 항공 대기업 데이코쿠중공업이 순수 일본산 부품으로 로켓을 쏘아 올리겠다는 원대한 도전에 나섰는데, 정작 핵심 부품인 엔진 밸브 특허권이 도쿄 변두리에 위치한 쓰쿠다제작소라는 중소기업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특허권 매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쓰쿠다제작소측은 자신의 회사에서 직접 엔진 밸브를 제작해 로켓에 장착하고 싶다며 스스로 하청업체가 되기를 역제안하고, 까다로운 관문을 뚫고 납품 성사는 물론, 로켓 발사도 성공시킨다는 줄거리다.
이 작품은 지난해 말 드라마로 만들어져 일본 사회를 열광케 했다.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일본에는 대기업 못지 않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중소기업이 적지 않은 까닭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모노즈쿠리’로 대변되는 일본 제조업의 원동력이 변두리 공장들의 기술력이 집약돼 이뤄진 것이라는 자부심과 정서를 자극한 영향도 크다. 원천기술 개발에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일본의 기업문화가 20명이 넘는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저력과 일맥상통한다는 의미도 더해졌다.
최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기의 바둑대결에 한국 사회가 열광했다. 알파고가 내리 3판을 이길 때는 인공지능 발달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두려워했고, 이세돌의 4국의 극적 승리에 이은 5국의 아쉬운 패배를 보며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도전 정신에 감탄했다.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드라마틱한 일주일간 세계의 눈이 한국으로 쏠렸지만 씁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번 이벤트의 주인공은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관심은 구글이 만들어낸 인공지능 알파고에 집중되다시피 했다. 이세돌이 대국료로 2억원 못 되는 돈을 챙기는 동안 구글은 10조원이 넘는 주식평가이익을 올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과거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한국을 강타했지만 실속은 개발회사인 블리자드사가 챙겼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알파고나 스타크래프트를 통해 얻은 교훈이라면 원천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의 소중함일 게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공지능 개발의 중요성에 대해 큰 경각심과 자극을 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정작 정부가 내놓은 인공지능 관련 대책을 보면 그다지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기업과 손잡고 지능정보기술 연구소를 설립해 2019년까지 구글을 뛰어 넘는 세계 1위 지식 데이터를 축척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3조원대의 투자 및 투자유도를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실현 계획은 보이지 않아 생색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알파고 쇼크를 계기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단편적인 대책이 아닌 우리 사회에 근원적인 병폐들이다. 기초 과학 육성에 인색한 한국 사회, 한국 기업의 체질 개선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과학자보다는 의사를 선호하는 풍토, 연구 개발보다는 겉포장에 치중하는 기업,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보다는 게임을 즐기는 소비성향만 강한 문화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미국 문학평론가 마이틸리 라오는 최근 시사교양지 ‘뉴요커’에 기고한 칼럼에서 한국인을 두고 “많은 사람이 책은 읽지 않으면서 노벨 문학상을 원한다”고 꼬집었다. 이 내용을 과학 분야에 인용한다면 “한국인은 연구 개발에는 소홀하면서 노벨상을 원한다”는 말도 무리없이 적용될 듯하다.
우연한 기회에 인공지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지만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비단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는 연구 개발에 꾸준히 투자하다 보면 언젠가 쓰쿠다제작소에 찾아온 기적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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