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는 물론 영국, 중국에서도 꾸준히 상연돼 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또 무대에 오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상투적이거나 편의적이다. 힐끗이라도 무대를 접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청각적으로 보다 풍요로워진 이미지가 소매를 잡아 끈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은 배우들의 몸짓은 숫제 춤이라도 추는 듯 하다.
“아, 이 제미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꺾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미전에 백반인지, 쇠뚝아 꼴똑아, 호도 엿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1972년 4월 드라마센터에서 초연됐던 ‘쇠뚝이 놀이’ 도입부에서 쇠뚝이가 내질렀던 말이다. 운율 짙은 우리 말을 근간으로 하는 골계미가 이번에는 볼거리와 들을거리의 십자포화 속에서 장히 가관이다. 새삼 확인되었듯, 들기름에 푹 절여둔 장판처럼 오태석 씨의 언어는 세월이 갈수록 윤기가 난다.
몬테규 가 패거리, 캐플릿 가 패거리가 모두 등장하는 도입부가 자못 위압적이다. 이완된 목화의 무대에서 쉬 볼 수 없었던, 어떤 비극적 긴장감을 내세우며 무대는 열린다. 경직된 무사춤의 위압적 군무로 표현되는 양가 젊은이들의 대립은 판이 진행되면서 충돌. 싸움, 유희 등으로 변형된다. 이 무대는 그 동선은 매우 양식적이다.
실제 연습에서 짤막짤막하게 배우들의 드나듦 정도만 지시할 만큼 모두에게 익은 무대다. 그만큼 배우들의 몸에 체화된 작품이다. 판이 젊어진 것은 젊은 배우들의 힘찬 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청각적으로 풍성해진 무대는 전문가들의 숙련된 기예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 6명(가야금, 거문고, 아쟁, 피리 등). 거기에 전통 무용가 강은지의 안무로 25명의 젊은 배우들이 빚어 내는 한국적 율동. 그 시너지 효과는 무대에 독특한 영기를 부여한다.
연극에서 전통 시청각 이미지의 환기력은 대단하다. 흥겨운 축제 장면에서는 덩더꿍 장단으로 극장을 달구다, 신파조로 갖은 청승을 떨어가며 뽕짝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만 없었다면…”(‘가슴 아프게’)을 천연덕스럽게 시나위 식으로 연주한다. 소, 닭, 돼지 등의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배우가 天, 地, 玄, 黃이라 쓴 판자 네 개로 도형 맞추기 게임을 시도해 보인다. 인간사란 것이 마치 이미 결정돼 있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듯.
전통 시청각 이미지로 가득 찬 무대의 압권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합방 장면일 것이다. 먼저 국악기들이 진양조로 서양의 발라드를 느릿느릿 연주하자, 음악에 맞춰 철부지 남녀가 버선 벗기기 등으로 작란(作亂)하며 취침 준비에 들어간다. 무대 바닥을 다 뒤엎는 호청을 드나들며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둘의 뒤에는 커다랗게 현무와 주작도가 펼쳐진다. ‘조상들이 다 지켜 주고 계신다, 그들의 음덕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긴 오태석식 메세지다.
한국적 정서는 언어적 측면에서 현란하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로미오 패와 처녀들이 맞닥뜨려 주고받는 수작을 보자. “자시에 생천하니 유유피창 하늘천(天) (로미오 패)” “천고마비에 오리 천(川)(처녀들)” “축시에 생지허니 양생만물 따지(地)(로미오 패)” “땅굴 속에 여우 지(地) (처녀들)” 마치 우리의 전통 민요처럼 매기고 받는 소리에 한국인이라면, 단전에서 흥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판이다. 그처럼 모두를 판 속으로 끌어들이는 신명성은 말뜻을 하나도 모를 해외 공연에서는 오히려 배가된다. 운율성 가득한 대사에다 활력 넘치는 몹 씬(mob scene)은 외국 관객들에게 자신의 고전을 새삼 돌아다볼 기회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언어는 고금을 마음대로 오간다. 목화가 익히 보여 온 고어투의 말만이 아니다.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사랑을 대놓고 요구하는 대목에서의 대사를 음미해 보자. “그래도 나 이쁘지? 솔직하게 말해. 나 까탈부리고, 찡그리고, 볼 내밀고, 콧물 질질 침 게게 흘리면서, 꿱꿱 거위소리 내면서 울 거야. 사랑한다고 해, 사랑한다고 해….”
공연이 탄력을 받아 제 갈 길로 잘 굴러갈지라도, 연출자는 보다 새로워질 것을 배우들에게 요구한다.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옛 그림자가 많이 남아 있어. 긁어요, 긁어!”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낸다는 척결(剔抉)이란 말의 원래적 의미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3월 23일부터 2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a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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