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유럽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건,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생가가 있는 아이제나흐에 들른 일이다. 4만 명이 채 못 되는 작은 소도시지만, 음악의 아버지가 태어난 이곳을 들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바흐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1층에는 바흐 시절에 사용된 오르간, 쳄발로, 팀파니 등 다양한 악기들을 볼 수 있다.
더 멋진 건 이곳의 큐레이터가 직접 악기를 연주해주며 당시의 문화사와 바흐에 대해 친절하게 소개해준다는 점. 2층부터는 본격적으로 바흐와 관련된 유물들이 소개된다. 바흐 가족이 가문 대대로 읽었다는 채색 삽화들이 들어있는 중세시대의 성경에서부터, 바이마르에서 궁정악사로 있던 바흐가 새로운 음악을 찾아 사직서를 낸 후 ‘괘씸죄’로 4주간 감금을 당할 때 사용했던 감옥열쇠까지, 흥미로운 게 많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갈색가죽으로 만든 구두였다. 바흐는 부친 사망 후 형과 함께 살았던 오르트루프를 떠나, 350㎞ 떨어진 뤼네부르크로 간다. 이곳에서 등록금 면제 학생으로 미하엘 학교에 입학허가를 받고 미사곡 합창단의 일원이 된다.
15살의 어린 바흐에게 350㎞는 꽤 긴 거리였겠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게오르그 에르트만이란 평생의 친구가 함께 이 길을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신었던 가죽 신발이라니 눈길이 더 갔다. 바흐에게 이 갈색구두는 새로운 삶과 음악의 지도 밖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물이었다. 뤼네베르크로 거처를 옮긴 후 바흐는 본격적으로 작곡을 위한 독습에 매진한다. 특히 뤼네베르크에는 150년의 역사를 가진 악보 도서관이 있었는데 바흐는 이곳에서 몇 날 며칠을 엎드려 악보를 사보하면서, 옛 악보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함부르크까지 60㎞를 왕복하며 당대의 유명 오르가니스트들의 연주를 직접 들었다. 연주자 겸 작곡가로서,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인간은 하루 평균 만 보쯤을 걷는다. 이로 인해 우리의 발에 가해지는 압력은 거의 500톤 정도다. 45㎏의 발레리나가 발끝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한 후 마루에 떨어질 때, 거의 250㎏의 압력이 발에 가해진다.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발이란 신체 부위를 감싸주는 패션 아이템이 바로 신발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발은 노예와 자유민을 구별하기 위한 지표였다.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맨발은 노예의 비천함의 표시다”라고 주장했다. 노예는 신발을 신는 것이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이 당시 노예들은 석고로 발을 싼 상태로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들을 백색석고를 한 인간이란 뜻의 크레타티(Cretati)로 부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역사 속에서 가난한 노동계층이 자신의 신발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1748년 영국 노동자들의 구두 바닥에는 무거운 징이 박혀 있었고, 뒤꿈치에는 금속으로 된 말굽이 달려있었다. 구두를 오래 신기 위한 일련의 장치였다. 당시 구두 한 켤레 값은 노동자들의 반 달치 봉급과 맞먹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두를 선물하거나 증여하는 일은 매우 관대한 행동으로 취급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영국의 존 리처드란 시민의 유언장에는 “나는 나의 장례식 때 스물네 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물네 켤레의 구두를 선물하겠다”고 밝힌 내용이 나와 있다. 이렇게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길을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걷기 위해서는 방향성 또한 나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 영어에서 ‘내가 당신의 입장이라면’이란 뜻으로 ‘If I were in your shoes’란 표현을 쓰는 것도 신발이 자유와 권리를 뜻하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입장을 갖기 위해선 ‘자유로운 인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가 향유되는 상황에 대해 먼저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진탕길을 걷느라 젖은 신발을 말려본 이들은 안다. 젖은 구두를 벗어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남우세스러운 일인지. 사회에서 소외된 채 생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이들에게, 젖은 발을 감싸고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는 일은 얼마나 보람찬가? 그들의 젖은 구두를 신어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생을 확장하는 기적이 될 것이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