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 기안문서 평균 182개
시간 없어 보육시간에 처리
“사실상 아이들 방치” 양심고백도
인력 늘려 업무 분담 절실하지만
교육청-정부 예산 줄다리기에 막혀
“저도 학부모예요. 우리 아이가 돌봄교실 있을 때 선생님이 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걸 생각하면 화가 나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돌봄전담사로 근무하는 A(39)씨는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공식 근무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수업을 마친 학생들의 식사를 챙기는 등 학교에 남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주 업무다. 하지만 쏟아지는 행정업무에 치여 20여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온전히 돌볼 수 없다고 A씨는 토로했다. A씨는 24일 “내가 좋아서 돌봄전담사를 하고 있긴 하나 서류 작성을 독촉하면 ‘조용히 책이나 보고 있어’ 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 도입된 후 박근혜정부 핵심 공약으로 2013년부터 확대된 초등돌봄교실은 방과 후 자녀를 보육하기 어려운 학부모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4년 발간한 ‘방과후 돌봄서비스 만족도 조사’에선 조사대상 학부모의 96.0%가 초등돌봄교실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역시 ‘자녀를 안전하게 돌봐주기 때문(71.7%)’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실상은 고품질 보육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돌봄전담사들이 일반 교사와 다름없는 각종 행정업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보육 서비스는 뒷전이라는 양심고백이다.
보통 계약직으로 고용되는 돌봄전담사 처우는 급식실 영양사와 비슷하다. 근무외수당도 없고 월 급여도 150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게다가 학교는 급식과 교실 청소는 물론 각종 서류업무 처리까지 ‘만능 선생님’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서울지부가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서울시내 18개 초등학교의 돌봄전담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전담사 한 명이 처리한 행정업무 기안문서는 이틀에 한 개 꼴인 평균 182개에 달했다. 하루 4시간 수업준비와 행정업무 처리 시간이 보장된 돌봄교실 담당교사와 달리 돌봄전담사는 별도 시간이 없어 작성해야 할 문서가 거의 매일 쌓여있는 셈이다.
업무는 이뿐이 아니다. 돌봄전담사 B(39)씨는 “아이들 간식도 직접 준비하는데 과일이라도 먹이려면 30~40분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한다”며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다 보니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봐 맘 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과중한 업무 부담은 보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모(36)씨는 지난달 돌봄교실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씨는 “돌봄전담사가 서류 제출 문제로 다른 교사에게 불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와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며 “전담사가 학생 관리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와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인력을 충원해 돌봄전담사의 업무를 분담하는 일이지만 교육 당국의 힘겨루기 탓에 예산 확보도 쉽지 않다. 현재 초등돌봄교실 운영비는 교육부 예산이 아닌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충당돼 실질적인 재정 부담을 지고 있는 시ㆍ도교육청과 공약 사업을 이행 중인 교육부 간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정부의 지원 없이 교육청이나 일선 학교가 자체적으로 돌봄교실을 확충하기엔 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맞벌이 부부나 한부모 가정처럼 돌봄교실이 절실한 계층이 분명 존재하는 만큼 정부가 서둘러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돌봄전담사 C(47)씨는 “학원에 가기 어려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학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방과 후 쉼터”라며 “돌봄교실이 단순히 시간 때우기 용이 아니라 진정한 공보육이 되기 위해서는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