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의 한 절에서 길고양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바닥에 밤송이를 깔아놓았다는 항의 글이 동물단체 홈페이지에 올라왔고, 절에서는 매년 겨울이면 밤송이로 화단 조경을 한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 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동물단체의 글을 읽으며 별 의심 없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종교가 변화하는 반려동물 문화에 호의적이고 않고, 동물복지 문제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만 해도 반려견과 절에 갔다가 절 관계자한테 여러 번 싫은 소리를 들었고, 내가 속한 캣맘(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을 칭하는 말) 모임의 회원은 천주교 기관에서 일하는데 길고양이 밥 주는 것을 싫어해서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럴 때면 법정 스님이 20여 년 전에 ‘정법세계’에 쓰신 글을 찾아 다시 읽는다. 스님은 글에서 ‘불교는 본연의 동물애호 사상을 고취시켜 한국인들의 정서를 순화해서 그로 인한 사회의 정화에 일조’해야 한다며 불교가 생명 존중의 의식을 퍼뜨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한 번은 동네에서 반려견과 산책 중이었는데 어르신 두 분이 교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웬만하면 전단지를 다 받는 편인데 그날은 한 손에는 개 줄과 똥 봉투, 반대쪽 손에는 엄마 심부름인 반찬거리가 가득 담긴 비닐 봉투가 들려있었다. 전단지를 받을 손이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지나쳤다. 그때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
“아이고, 그렇게 애지중지 해봐야 개는 영혼이 없어. 죽으면 땅으로 꺼진다고.”
많이 순화한 표현이다. 이날 너무 상처를 받아서 한 동안은 교회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면 주먹을 꼭 쥐고 받지 않았다. 나름 소심한 복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웃은 반려동물과의 이별 후 동물은 정말 영혼이 없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또한 한국 천주교는 유난히 개식용에 관대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새들에게 복음을 설교했다는데,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동물도 만드셨다는데 같은 피조물에 대한 대우가 왜 이리 다른지. 종교라는 게 삶의 도덕적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닌지. 이어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앤드류 린지라는 신학자를 만났다.
옥스퍼드 대학의 동물윤리센터 설립자인 앤드류 린지는 영국성공회 신부이다. 그에게 종교를 윤리적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기준은 종교가 사람에게 더 사랑하고, 더 자애롭고, 더 연민하는 삶을 만드는 가이다.
또한 동물권 신학의 핵심은 관대함의 윤리이며, 동물은 인간과 평등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더 큰 고려의 대상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약자에게 도덕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자를 먼저 돌보라는 당연한 말이 왜 이리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뭉클한지.
저자가 어린 시절 입양한 유기견 바니는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털북숭이 로켓이 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바니가 병을 얻어서 떠나는 날, 그는 교회가 신자들이 집이나 차를 사면 축복해주지만 반려동물이 떠났을 때에는 어떤 목회적 배려도 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신학자가 된 후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동물을 사랑하듯 하나님 역시 당연히 그러할 거라는 마음으로 동물장례식을 위한 예배문을 만들었다. 또한 기독교 채식주의자인 그에게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종교와는 부합했다.
종교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종교처럼 신의 얼굴을 멋지게 가리는 것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른 존재의 고통에, 그들의 울음소리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종교가 참된 종교일까. 종교가 이 지독한 인간중심주의 세상을 더 부추기지 말고 인간을 구원해 주기를.
김보경 책공장 더불어 대표
참고한 책: 동물 신학의 탐구, 앤드류 린지, 대장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