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김경욱의 ‘한국 영화는 무엇을 보는가’(강,2016)는 지은이의 세 번째 영화 평론집이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씌어지는 시를 부끄러워했다지만, 지은이의 평론집은 늘 술술 읽힌다. 진지한(?) 영화 평론가들은 김기덕 ? 홍상수 영화를 붙들고 씨름을 하는데 김경욱은 작가주의 영화를 의식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이다. 아직 1,000만 관객의 영화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던 2002년, ‘친구’를 본 지은이는 첫 번째 평론집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 영화의 나르시시즘’(책세상,2002)에 이렇게 썼다.“인구 4,700만의 남한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면, 그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이 곧 우리 정체성의 일부라고 판단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영화이론을 공부하기 이전에 사회학을 전공했던 지은이는 두 번째 평론집의 제목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강,2013)에 자신의 비평 방법론을 슬쩍 드러냈다.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탐색”하려는 영화사회학 논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래도 작가주의 영화가 아니라 초대형 흥행작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아날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르크 블로크를 떠올려준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왕’(한길사,2015)에서 “위대한 일류 사상가를 참조하는 것보다, 이류 작가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면서 역사가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이 작품들은 대개 사상적 수준이 매우 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저작들은 평범함과 조잡함으로 공통의 관념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민중의 감정을 생생하게 파악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훨씬 좋다.”
흥행을 목표로 하는 대중영화는 그 시대의 욕망과 무의식, 역사적 상처와 사회적 징후를 반영하고 은닉한다. 한국 영화는 지금까지 총 13편의 1,000만 관객 영화를 낳았는데, 최근 2, 3년 사이에 1,000만클럽에 입성한 영화의 특징은 모두 주인공이 희생하는 이야기다. ‘변호인’(2013) ? ‘명량’(2014) ? ‘암살’(2015) ? ‘베테랑’(2015)같은 영화에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것은 2008년 이후, 한국 사회가 밟아온 퇴행과 폐색을 드러낸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주범들에게 현실의 장에서 표출해야 할 분노를 스크린을 향해 해소”했다.
광장에서 분출되어야 할 분노가 극장에서 대리 만족을 구하고자 했던 사태가 앞서의 영화들을 1,000만클럽에 등재시킨 힘이었다면, 영화계에 좌우논쟁을 불러 온 ‘국제시장’(2014)의 원동력은 달랐을까? 1960, 70년대 여성 멜로드라마에서 시련 받는 여성 주인공을 남자(덕수)로 고스란히 바꾸어 놓은 신파극(新派劇)이 바로 ‘국제시장’이라는 지은이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감정으로 현실을 억지 봉합하려는 이 신파 역시 폐색된 한국 사회의 판타지(대리 만족)가 흥행의 동력이었다.
지은이는 이번 책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영화 관람 현상을 스테판 G. 메스트로비치의 ‘탈감정사회’와 연결시키면서 아주 재미난 가설을 제시했다. 2008년 5월 2일,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대한 반대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권의 강력한 진압과 시민들의 전략 부재로 흐지부지됐다. 그때부터 현실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거나 억누르면서 극장 스크린에 온갖 감정을 투사하는 특이한 영화 관람 현상이 생겨났고, 그것이 1,000만 관객 영화가 줄지어 나오게 된 사소한 비밀이다.
5,000만 인구에서 한 편의 영화를 1,000만명 이상이 본다는 것은, 극장에 가기 어려운 연령을 제외하면 대략 4명 중 1명이 같은 영화를 본다는 뜻이다. 즉 ‘변호인’의 관객이 ‘국제시장’의 관객이다. 이런 사정은 대기업의 영화 진출과 독과점이 관객의 선택권을 모조리 탈취해 간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앞으로 우려되는 것은 영화산업에서의 때 아닌 정경유착이다. 극장을 구하지 못한 ‘다이빙 벨’과 안정적인 상영관을 확보하고 단체관람을 유치했던 ‘연평해전’이 지은이의 우려를 입증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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