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케이신문 핀테크 매체 창간
다양한 핀테크 창업 열풍
금융기관과 폭넓은 협업
‘일본은 신생 창업기업(스타트업)의 불모지인가?’
전 세계에 스타트업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많았다. 일본은 아직도 도요타, 소니, 캐논 같은 대기업의 나라인데다가 청년들도 취업이 잘 돼 창업 의지가 높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지난달 도쿄에서 열린 ‘파이오니어스 아시아’라는 스타트업 콘퍼런스에 다녀오면서 일본도 더 이상 스타트업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열도까지 휩쓴 핀테크 열풍
우선 일본 열도에도 어김없이 핀테크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핀테크 혁명에 대해 보도해 온 일본 최대 경제신문인 닛케이신문은 3월 ‘닛케이 핀테크’라는 온라인 전문 매체를 창간했다. 컨퍼런스 참관권을 포함한 1년 구독료가 48만엔(약 500만원)에 이른다. 경제 주간지마다 핀테크특집을 커버스토리로 올리고 있다. 서점에는 ‘핀테크혁명, 드디어 일본 상륙’이란 제목의 책이 맨 앞에 진열돼 있다.
일본의 금융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마루노우치 도쿄은행연합회빌딩에는 지난 2월1일 피노라보(FinoLab)라는 곳이 생겼다. 일본의 3대 은행 본점이 있는 이 거리에 핀테크 스타트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미 16개 유망 핀테크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 일본 최대 광고대행사인 덴츠가 운영하는 이 공간에는 매일 전국의 금융 관계자가 찾아온다. 은행들은 핀테크 관련 조직을 신설하거나 핀테크 연구와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미 사업이 상당 궤도에 오른 핀테크 스타트업도 많다. 개인 자산관리 분야에서는 머니포워드와 머니트리가 유명하다. 머니포워드는 350만명, 머니트리는 100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했다. 이들은 모든 은행 거래 내역과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자동으로 연결해 분석해 주는 일종의 온라인 가계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들 서비스에 연결된 일본의 금융기관은 약 2,600개로 거의 모든 은행, 증권사, 카드사 등이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머니트리의 경우 호주인인 폴 채프먼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직원의 절반 정도가 외국인일 정도로 국제화돼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보안 등 우려로 금융기관의 이용자 데이터를 외부 스타트업이 긁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온라인 가계부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프리(Freee)라는 핀테크 회사는 클라우드 회계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 소규모 기업이 엑셀 등을 쓰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회계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다. 벌써 50만명의 기업인이 쓰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원하면 회사의 재무 데이터를 외부에 실시간으로 공유해줄 수 있는 기능도 있다. 이를 이용해 일본 지방 은행인 기타구니은행은 복잡한 대출 심사 과정 없이 효율적 대출을 해줄 수 있게 됐다. 또 아마존재팬은 쇼핑몰 입점 상인에게 복잡한 심사 절차 없이 현금흐름과 성장성을 보고 바로 대출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못지 않게 지극히 보수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금융업계에서 이미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핀테크 스타트업이 나오고 있고 금융기관들과 폭넓은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공인인증서, 액티브엑스 등을 사용해야만 하는 규제 때문에 갈라파고스화한 한국의 금융 업계와 달리 일본만 해도 금융 정보기술(IT) 환경이 국제 기준을 따르고 있고 글로벌 회사들도 들어와 적극 활동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력있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닛산ㆍ소니ㆍ올림푸스 엔지니어
스마트 전동 휠체어 회사 창업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급부상
두 번째로 느낀 변화는 실력 있는 일본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부상이다. 최근 참석한 콘퍼런스의 최종 결선에서 우승한 ‘휠’(WHILL)은 이 행사에서 만난 수 많은 일본의 하드웨어 스타트업 중 하나였다. 이 업체는 사용하기 불편하고 디자인도 흉한 기존 휠체어를 대폭 개선한 스마트 전동 휠체어를 개발했다. 미래형 디자인에 스마트폰 소프트웨어(앱)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심지어 목적지를 설정하면 자동 운전해 가는 기능까지 있다.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제품이다. 최근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까지 받아 전 세계 판로를 개척 중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업체의 공동 창업자들이다. 자동차 회사인 닛산, 전자업체 소니, 카메라ㆍ의료기기 회사인 올림푸스 출신의 30대 개발자(엔지니어) 3명이 의기투합해 창업했다. 스마트 휠체어를 만들기 위한 이상적 조합이다.
그 동안 대기업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던 일본의 엔지니어들이 이제 스타트업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콘퍼런스 행사장에서 만난 벤처캐피털 본엔젤스의 김범석 일본지사장은 “시부야에 가보면 낡은 빌딩들 구석구석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독특한 제품을 개발하는 일본의 창업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장인 정신을 가진 일본의 엔지니어들이 스타트업으로 가면 어떻게 될 지 기대가 높다.
대기업과 협업 자생적 생태계
신생기업과 대기업 만남의 장
한국, 정부 시대착오적 규제 여전
대기업 관심ㆍ투자는 걸음마 단계
한국도 자생적 협업 생태계 구축해야
세 번째로 느낀 것은 일본 대기업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는 정부의 거창한 창업 지원 정책이나 멋진 창업 지원 공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고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모닝피치라는 행사다. 도쿄 신주쿠에서 매주 목요일 오전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리는 이 행사는 스타트업 4,5개 팀과 대기업 및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만남의 장이다. 오는 7일 열리는 모닝피치는 벌써 144회다. 150명이 참석할 수 있는데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일찍 마감 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정부의 입김 없이 완전히 민간 기업 중심으로 이런 행사가 꾸준히 운영되고 있다.
내실 있게 성장하는 일본의 스타트업을 보면서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꼈다. 일본은 적어도 역량 있는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협업할 수 있는 생태계가 돼 있는 나라다. 게다가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의 내수 시장까지 있다. 일본의 스타트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외국인 인재들도 많다.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
정부가 대대적인 창조경제 드라이브를 거는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언뜻 활발해 보인다. 하지만 온라인 중고차 매매업체 헤이딜러, 심야 콜버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시대착오적인 규제는 여전하다. 한국인으로만 이뤄진 스타트업들은 다양성이 부족하다. 높은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 하드웨어 분야에서의 창업과 성공사례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한국대기업의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도 이제 시작이다.
한국의 스타트업들이 마음껏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고, 대기업 등 민간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활발한 투자와 협업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자생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ㆍ사진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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