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칸막이 때문에…
보험상품 청약시 전자서명 허용
금융위서 시행령 개정 나섰지만
법무부 “정보 유출 위험” 난색
이해관계자 반발
5만원 이하 무서명 카드 거래
VAN대리점 “수수료 줄어든다”
이달 시행 예정서 무기한 연기
온라인 비즈니스 솔루션 업체 A사의 김모 대표는 야심작인 ‘실손의료보험 안심청구 원스톱서비스’만 생각하면 속이 탄다. 이 서비스는 보험가입자가 간편하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대표적인 핀테크(Finance+Technology) 서비스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보험금청구서, 진료기록사본 등 데이터를 보험회사에 전송하고, 보험회사는 이를 확인한 뒤 보험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2014년 11월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 추진키로 하고 금융당국이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2년 넘게 진척이 없다. 의료업계가 민영 보험회사에 진료기록을 송부해줘야 하고, 개인의 진료기록이 유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서비스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어서다. 김 대표는 “규제를 풀겠다고 해도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경우 부처간 입장도 엇갈리며 다시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몰고 온 ‘규제완화’ 바람으로 대표적인 규제산업인 금융분야도 그간 많은 빗장이 풀렸다. 임종룡 금융위원장 취임 이후 1년간 명시적인 금융규제 220여개, 보이지 않는 그림자규제 650여개를 없애거나 개선했다는 게 금융위의 자평이다. 그러나 금융현장 체감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금융당국이 규제를 풀어도 이해집단의 반발과 부처간 칸막이로 좌초되고,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한 규제가 도입되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규제가 변형되거나 새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부처간 장벽은 금융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요인 중 하나다. 보험상품 청약 시 전자서명이 제한되는 규제가 대표적이다. 핀테크 발달로 온라인 상에서 계좌 개설과 상품가입이 가능해졌지만 ‘보험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계약’은 여전히 전자청약이 불가능하다. 금융위가 2011년 보험업법시행령을 개정해 ‘설명의무 이행 확인방법’으로 전자서명을 추가했지만, 상법 731조는 아직도 서면동의만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항이 만들어진 1991년에는 종이에 의한 동의 방식이 유일한 대안이었으나, 정보통신(IT)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시대에 뒤쳐진 법조항이라는 지적이다. 금융위의 협조요청에도 상법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전자서명이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개정에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IT업계에서는 전자서명이 종이서명보다 정보유출 가능성이 적고, 위ㆍ변조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선거 때마다 신설되는 포플리즘적 규제도 금융권을 옥죄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선불카드 미사용잔액 및 신용카드포인트를 공익재단에 기부하라며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 개정안을 꼽고 있다. 개정안은 연간 1,000억원 수준인 신용카드 소멸 포인트 등을 사회취약계층에 기부하도록 한다는 취지로 통과됐다. 그러나 카드업계에서는 현재도 카드포인트와 선불카드 사용률이 95% 이상인 상황에서 남은 부분을 기부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선거를 앞둔 포퓰리즘으로 보고 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용처 등은 업계 자율에 맡겨야 하는 사안”이라며 “17~18대 국회에서 사장된 법안을 다시 20대 선거에서 회생시켰다”고 토로했다. 앞서 정치권은 영세ㆍ중소가맹점에 대해 정부(금융위)가 수수료율을 정하도록 하는 전 세계에 유례 없는 법을 2012년 3월 통과시켰고 이는 지난해 영세가맹점 수수료율 대폭 인하로 이어졌다.
이달 시행 예정이던 5만원 이하 무서명 카드거래의 무기한 보류는 이해관계자 간 갈등으로 없어질 규제가 다시 살아난 경우다. 지난 1월 금융위는 5만원 이하 무서명 결제 등을 담은 여신전문금융업감독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무서명 거래가 늘어날 경우 주요 수입원인 종이전표 수거 수수료가 대폭 줄어드는 밴(VAN)대리점의 반발이 거세지자 시행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전표수거 수수료를 줄여 금융소비자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취지의 규제완화는 언제 실행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작년 1월 국내에 도입된 ‘대체부품 인증제도’도 완성차업체 및 부품생산업체의 반발로 사장될 위기다. 이 제도는 자동차 정비ㆍ수리 시 저렴하고 품질이 우수한 대체부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추진한 규제 완화책이다. 고가의 정품 대신 대체부품이 활성화될 경우 수리비와 보험료 인하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완성차업체 및 부품생산업체가 갖고 있는 정비용 부품 디자인권과 충돌하면서 이 제도는 고사상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와 수입차 업체, 부품 생산업체들이 대체부품 인증제도의 발목을 잡으면서 1년간 출시된 인증품은 단 2건”이라고 말했다.
이 뿐 아니다. 금융권에서는 ▦중금리 대출을 활성화하겠다면서도 저축은행 광고를 시간대별로 제한하고 ▦카드사태 때 만들어진 연회비 10% 이내 경품제공 규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금융회사 기관경고 시 신사업 진출을 금지하는 것 등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규제 완화는 금융회사들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규제가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별로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라며 "금융당국이 정치권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규제에 '안 된다'는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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