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때 아닌 ‘삼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4ㆍ13 총선을 앞두고 광주에 삼성그룹이 추진 중인 자동차 전기전자장치(전장) 관련 시설 유치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지역은 물론 중앙 정치권, 산업계의 반응이 뜨거워지고 있는데요.
조원동 새누리당 공동경제정책본부장은 8일 더민주의 삼성 공장 광주 유치 공약에 대해,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조 본부장은 이날 오전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나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하면 그 동안 경제민주화, 또 재벌 대항마 라는 아이콘을 쌓아 왔던 분 아니냐. 그런 분이 어떻게 재벌에까지 손을 내밀게 됐나”라며 일침을 놓았는데요.
앞서 6일 김종인 더민주 대표는 ‘광주 경제 살리기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그룹이 전략사업으로 추진 중인 자동차 전장 분야를 광주에 유치해 5년 동안 2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당내에서는 이 공약을 ‘양향자 플랜’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전남 화순 출신으로 삼성그룹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으로 알려진 양향자(광주 서구을) 후보가 당초 지역 공약으로 제시한 것을 중앙당 차원의 공약으로 승격을 시켰다고 합니다. 양 후보는 “광주 지역 경제의 최대 현안인 삼성전자 광주사업장 해외 이전으로 입게 될 지역 경제의 타격을 자동차 전장 사업 유치로 상쇄시키겠다는 것”이라며 “삼성의 자동차 전장 분야 유치로 광주의 또 다른 현안인 기아차 광주공장 100만대 생산 프로젝트도 한꺼번에 해결 가능한 대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앞서 1월 광주 사업장의 3개 라인 중 김치냉장고 라인을 베트남 호치민시로 이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일부 라인이지만 연 매출 4조8,000억원, 광주 지역 총 생산량의 17.5%, 연간 법인세 300억원에 이르는 사업장이 해외로 이전할 경우 지역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 동안 광주 정치권에서는 삼성전자 생산 라인 해외 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왔지만 국내 대기업들이 국내 생산량을 줄이고 인건비가 싼 해외 공장의 생산량을 늘리는 추세를 막기는 힘든 상태죠. 기아차 광주공장의 경우도 광주 민심은 광주 공장의 생산량(현재 연 68만대)을 늘려달라 요구하지만 기아차는 줄이면 줄였지 늘릴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번 더민주의 ‘삼성 자동차 카드’는 줄어든 생산 라인을 활용해 삼성이 추진하는 새로운 사업을 유치하자는 아이디어를 공론화한 것이 때문에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던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다른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광주뿐만 아니라 삼성그룹이 지난해 12월 자동차 전장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삼성전자 사업장이 있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 사업 유치를 위해 물밑 경쟁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삼성은 기존 반도체 기술을 기반으로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에 전기차용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는 계열사들과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각 사업부와 계열사에 흩어져 있는 자동차 전장 사업 간의 협력을 강화해 단기간에 스마트카에 필요한 자율주행 기능 등 핵심 기술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윤장현 광주시장도 7일 “지난 1월 삼성 가전라인의 이전과 관련해 삼성의 사장단이 광주를 방문했을 당시 삼성의 프리미엄 가전분야 투자 확대와 함께 삼성의 자동차 전장 부품산업을 광주에 투자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며 “서병삼 가전분야 부사장 등이 직접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룹 수뇌부에 광주시와 시장의 뜻을 전달하겠다고 했다”는 대화 내용도 자세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더민주의 광주 공약이 공개된 후 또 다른 삼성전자 공장이 지역 출마 후보들은 일제히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도 눈길을 끕니다. 충남 아산을에 출마하는 이건영 새누리당 후보는 7일 “삼성(전자)의 아산 이탈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한 현실에서 더민주는 아산을 포기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삼성의 전장사업은 반드시 아산에 유치시켜 지역발전을 이루겠다. 이를 위해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 힘을 실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더민주 관계자는 ‘삼성이 추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는 지적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전장사업 자체를 검토한 바 없다는 게 아니라 전장사업을 광주에 추진하는 것을 아직 검토한 적 없다는 것”이라며 “양 후보가 삼성 측과 만나 전장 분야 광주 유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삼성 측 관계자도 “전장 사업의 사업성을 모색하는 단계이고 당장은 아니지만 이를 추진하기 위해 적절한 장소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라며 “올해 초 양 후보를 만났으며 양 후보뿐만 아니라 광주에 출마하는 국민의당 후보들도 만나 삼성전자 라인 이전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더민주가 제시한 공약 자체가 허무맹랑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문제는 이 내용을 총선을 1주일 정도 앞두고 던졌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더민주의 이번 ‘삼성 자동차 카드’는 야권의 텃밭이자 심장인 광주에서 국민의당과의 경쟁이 녹록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정치적 선택’ 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요 여론조사에서 광주의 선거구 8곳 중 더민주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오는 곳은 1곳뿐입니다.
더민주 측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당 관계자는 “광주의 선거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동안 작업을 해 온 삼성 자동차 공약을 히든카드로 꺼낸 것”이라며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광주 최대 현안인 경제 문제와 일자리 창출 관련 공약으로 유권자들에게 심판을 받아보겠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친노패권주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앞세워 호남 유권자들을 공략하고 있는 국민의당에 맞서 경제, 일자리 이슈를 전면에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하겠다는 전략적 판단도 깔려있는데요. 더민주 광주시당 차원에서 선거 캐치프레이즈를 ‘더민주를 뽑으면 일자리가 옵니다’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삼성 측은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삼성 관계자는 “개별 정당의 공약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설사 사업을 추진한다 해도 이는 마치 특정 정당을 밀어주는 것으로 미칠 수 있고 이는 대기업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정치적 고려’에 따른 사업 추진이라는 여론의 비판에 직면할 수 있고, 다른 지역과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사업성을 위주로 향후 사업 계획을 짜야 하는 대기업이 정당을 의식해 움직일 경우 기업이나 국가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더민주 소속의 윤장현 광주시장도 “정치권의 진정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광주발전과 시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조심스럽게 풀어가야 한다”며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해 역작용이 나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우려했습니다. 조심스레 추진해도 될까 말까 한 중대 사안을 당에서 총선 공약으로 꺼내 들어 실현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걱정입니다.
호남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국민의당은 더민주의 ‘삼성카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철수 상임공동대표는 “정치가 시키면 기업이 무조건 따라 갈거라 생각하는 5공식 발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정현 대변인은 “선거를 일주일 남겨놓고 급조된 선심성 공약”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향자 후보의 경쟁 상대인 천정배 후보는 7일 광주 기아차 공장을 찾아 “광주와 호남이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자동차 100만대 생산이 선두에 자리해야 한다”며 “호남민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자동차 100만대 생산과 광주형 일자리 창출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양 후보의 ‘삼성 자동차’에 천 후보는 ‘기아 자동차’로 맞선 모양새인데요. 지병근 조선대 교수는 “광주에서는 그 동안 정치 아젠다만 넘쳐났는데 경제, 일자리를 전면에 내세운 것 자체는 차별화 된 시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며 “그러나 광주 유권자들이 과연 이 시도에 얼마나 시도할 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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