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준공 부산 최초의 근대공원
‘용두산 엘레지’ 사랑을 속삭이던 계단
부산타워 팔각정 뒤편엔 화재예방 부적도
‘부산’ 하면 제일 먼저 용두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들을 비롯, 외지인들은 누구나 한 번쯤 용두산공원을 찾는다. 부산타워, 청동의 충무공 동상, 노랑 빨강의 꽃시계 앞에서 사진 한 장 안 찍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있던 일본 신사의 어대전 기념사업으로 지금의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졌다. 공원이면서 한편으로 황국신민화를 위한 각종 집회들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해 1933년 12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일장기 게양대(102척)가 세워졌고 한국 최초의 사진 촬영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16년 준공된 부산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올해로 ‘준공 100년’을 맞는 용두산공원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피난, 산업화, 민주화 등 부산 나아가 우리나라의 드라마틱한 근대화 역정과 궤를 같이해왔다.
광복로 입구에서 시티스팟 방향으로 가다 보이는 4단 에스컬레이터. 밑에서 바라본 에스컬레이터의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만큼 가파르다. 용두산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은 지금은 에스컬레이터지만 원래는 돌계단(1927년 설치)이었다. ‘194계단’으로 불렸던 이곳은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딛어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 구십사 계단에…’로 시작하는 ‘용두산엘레지’라는 노래로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명소였다. 계단 오를 때 그냥 오르는 연인들은 없었다. ‘가위바위보!’ 하면서 올라오는 연인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광복로 입구서 머지않아 오른쪽 주차장과 연결되는 작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한때는, 정확히는 1936년까지 부산부청 앞 사거리였다. 이 사거리에 넓적하고 긴 돌계단이 여남은 층으로 깔려있다. 이 돌계단은 부산부청 청사를 옛 부산시청 청사로 옮길 때까지 반세기도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숱한 일본 관리들의 발길에 닳다시피 했던 계단이었다.
/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는 직경 5m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침이 달린 꽃시계를 뒤로 하고 오른 공원 중심부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선 채 6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상이 들어선 건 1955년. 1960년대 용두산공원 사진을 보면 넓은 공간에 동상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데 텅 빈 공원에 동상부터 세운 이유는 동상 건립을 통해 당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6?25전쟁 당시 용두산공원에 4년 가까이 낙동강 전선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을 감행했던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다. 그것을 기념한 비가 해병대주둔기념비다.
/ 용두산공원의 백미는 부산타워. 120m 높이의 탑 전망대에 오르면 부산항을 중심으로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외지에서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빠트려서는 안 될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부산시 중심의 길게 뻗은 시가지와 아름다운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부산타워가 건립된 건 1973년으로 전국체전에 맞추어 전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전망대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3층 옥신(몸돌)을 본떠 만든 탑신 위에 둥근 기둥탑을 세우고 최상단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조망하기 위해서 건물을 짓는다는 생각을 못하던 시절에 높이도 그렇지만 43초 만에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고속 엘리베이터는 그야말로 큰 화제였다. 전국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으며 두려움 때문에 타워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냥 올려다보기만 하는 관광객도 많았다.
/ 1950년대, ‘섰다 하면 교회요 났다 하면 불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산은 화재가 많았다. 화재 예방을 위한 부적이 이 공원에 있다. 부산타워 팔각정 뒤편 담장 밑 인적이 드문 숲 속에 앞면에 ‘용두산신위’, 뒷면에 ‘부산에서 일어나는 수해와 화재를 예방한다’는 의미의 ‘부산수화예방’이란 글과 함께 부적의 문양이 음각된 비석이 있다.
홍성권 작가ㆍ부산관광공사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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