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 부산 레드 카펫이 텅 빌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최근 2년 가량 지독한 갈등을 겪어 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벼랑 끝으로 계속 몰리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문화행사인 부산영화제가 파국적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요 영화단체들로 구성된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범 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범 영화인 비대위)는 18일 보도자료를 내고 올해 부산영화제 참가 전면 거부를 결의했다고 밝혔다. 범 영화인 비대위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여성영화인모임, 영화마케팅사협회로 구성돼 있다. 현장 영화인 대부분이 이들 9개 단체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어 범 영화인 비대위의 선언은 영화계 전체의 입장이나 마찬가지다.
상황은 꼬일 대로 꼬이고, 사태 인식은 안일
범 영화인 비대위는 지난달 21일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시가 부산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은 범 영화인 비대위 상임 대표는 “지난 1일부터 각 단체별로 전화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속 회원들의 의견을 취합해 나온 결론”이라며 “단체별로 회원 과반수가 의견을 밝혔고 응답자 중 90% 이상이 보이콧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범 영화인 비대위의 이날 선언으로 제21회 부산영화제는 파행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산영화제는 2014년 제19회 영화제 이후 부산시와 갈등에 휘말려 있다. 서병수 부산시장 겸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이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 벨’의 부산영화제 상영을 반대하면서 갈등은 불거졌다. 영화제는 영화제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다이빙 벨’ 상영을 강행했고, 이후 싸움은 확대됐다. 2014년 부산시와 감사원의 부산영화제 감사, 지난해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부산시의 이 위원장 검찰 고발 등을 거치며 갈등은 영화계 전체로 번졌다.
지난 2월 영화제 정기총회에서 이 위원장이 재선임되지 않고 사실상 해촉되면서 갈등은 정점으로 향했다. 부산영화제 관계자들과 영화인들은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 확보를 위해 영화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의 조직위원장 선임과 정관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부산시는 현행 정관으로도 영화제의 독립성이 보장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부산영화제가 새 조직위원장 선임과 정관 개정을 위해 신규 자문위원 68명을 임명하고 부산시가 이에 반대하면서 대립은 격화됐다. 부산시는 신규 자문위원은 부산시민이 만든 영화제를 흔드는 불순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부산지방법원에 신규 자문위원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지난 11일 부산지법은 가처분신청 인용 결론을 내렸다.
법원이 부산시의 손을 들어줬으나 갈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부산시에 대한 영화인들의 분노에 부산시의 안일한 대응이 맞물리며 부산영화제를 존폐 위기로까지 몰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화인들은 서 시장의 ‘다이빙 벨’ 상영 중단 요청을 영화제의 독립성을 훼손한 중대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제의 자율적인 상영작 선정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데 서 시장이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칸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 관계자들과 해외 유명 감독들이 부산영화제 지지를 잇달아 밝히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부산영화제 관계자는 “부산시는 영화인들의 보이콧을 영화계 일부의 불만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 말고도 부산영화제를 찾을 사람은 많다는 식의 인식을 지녔다”고 전했다.
“반쪽 영화제도 안 될 판” 절망적 목소리
부산시의 인식과 달리 범 영화인 비대위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은 대표는 “‘다이빙 벨’ 상영에 따른 이용관 위원장의 사실상 해촉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영화인들이 납득할 만한 인물의 조직위원장 선임, 부산시의 진정 어린 사과가 있지 않으면 보이콧 결의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범 영화인 비대위의 선언으로 올해 부산영화제의 원활한 진행은 이미 물 건너 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쪽 영화제도 안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들려온다. 부산시가 명망 높은 원로 영화인 중 한 명을 조직위원장으로 영입해 사태 해결에 나서려 한다는 소문이 있으나 영화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한 영화인은 “부산시가 영화인들에게 등을 돌리고서도 성공적인 영화제 개최를 자신한다는 게 의아하다”며 “20년 동안 애써 가꿔온 부산영화제가 이리 무너지니 그저 참담할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제를 둘러싼 갈등이 발목을 잡으면서 올해 영화제 준비가 여느 해보다 더딘 점도 우려를 사고 있다. 부산시가 지원하기로 한 예산이 아직 부산영화제 쪽에 전달되지 않아 영화제 운영에 애를 먹고 있다. 부산영화제 관계자는 “기업 후원 확보도 여의치 않아 (프로그래머 등의)출장비 삭감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이라며 “이달 말까지 (조직위원장 선임과 시 지원 예산 입금 등) 현안이 해결돼야 영화제 준비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의 예산은 약 120억원으로 부산시 지원액은 60억5,000만원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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