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위작 1990년대 유통
2010년대 단색화 유행 타고
이우환ㆍ김환기 위작 기승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상승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상품 공급자가 수요에 맞춰 공급량을 늘리겠지만 미술시장은 다르다. 가격이 높다고 작품을 찍어낼 수는 없다. 충족되지 않는 수요와 치솟는 가격. 이때 비집고 들어오는 게 바로 ‘위작’이다.
시대별로 인기 있는 그림이 다르듯 위작도 유행을 탄다. 한때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했던 권모(69)씨는 최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천경자 그림을 탐내는 사람이 많은데 시중에 나오질 않으니 ‘가짜로 하나 그려달라’는 의뢰가 많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고서화가 시장에 풀렸다. 주택구조 변화 등으로 집안에 있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버려진 것이 대표적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삶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며 미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화랑 개념도 생기기 시작한 때다. 고서화를 중심으로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자 인사동 등지에서 위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위작을 만드는 데 조직폭력배들이 개입하기도 했다”는 말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근대 회화 위작이 많이 나왔다.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 등 근대 6대 한국화가의 작품이 특히 인기가 좋았다. 고미술품 수복 기술자로 인사동에 발을 들인 권씨도 “당시 청전의 작품을 잘 그린다고 소문이나 의뢰가 많았다”고 전했다. 1990년대에는 서양화 인기가 높아졌다. 동양화의 절색주의라는 편향을 극복한 천경자의 채색화도 이때 많이 유통됐다.
지금은 단연 단색화다. 최근 불거진 이우환 화백 위작 논란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이달 초 ‘무제’가 해외에서 49억에 가까운 가격에 팔린 김환기 화백의 경우도 심심치 않게 위작 논란에 휘말린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2010년 이후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들며 미술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니 갖고 있던 단색화 작품 유통을 본격화한 것 아닐까”라며 “(크게 이목을 끌지는 않는)해외 중간급 경매 등에서 이력이 붙으면 가짜 그림이 자연스럽게 진품으로 둔갑된다”고 말했다.
‘포스트 단색화’에 이어 어떤 조류의 작품들이 위작 논란에 또 휘말릴지는 불분명하지만, 미술계에서는 위작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은 작가들이 공공연히 거론되기도 한다. 미술품 유통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어떤 작가의 경우는 조직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가짜가 진품 개수보다 많은 것 같다”며 우려했다. 조수 여럿을 두고 작품 활동을 이어 가는 한 작가는 조수가 바뀔 때마다 그림 스타일이나 수준이 바뀌어 “실력 떨어지는 조수가 작업한 진짜 그림이 잘 그린 가짜 그림에 밀릴 수도 있겠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듣는다.
한 미술계 인사는 천경자 화백의 유족이 제기할 소송 등 미술계 굵직한 이슈를 언급하면서 “이런 사건들은 결국 감정의 불완전성이나 미흡한 유통체계 등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내 미술유통의 근본적인 개선 없이는 위작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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