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2.8세. 내달 13일 첫 방송될 tvN 새 금토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주인공 8명의 평균 나이다. 출연자 중 막내는 환갑을 훌쩍 넘긴 배우 고두심(65)이다. ‘국민 엄마’ 김혜자를 비롯해 나문희, 윤여정, 신구, 주현 등 노배우들이 줄줄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드라마라서다. tvN이 그간 같은 시간대 젊은 배우들을 내세운 드라마 ‘미생’이나 ‘응답하라 시리즈’ 등을 내보냈던 걸 고려하면 분명 파격적인 편성이다. 대본을 쓴 노희경 작가는 “아직도 살아있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황혼 청춘’을 우린 너무 모른다”며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2. ‘아침에 일어나 틀니를 들고, 잠시 어떤 게 아래쪽인지 머뭇거리는 나이가 되면 그때 가서야 알게 될 거야, 슬픈 일이지’. 밴드 산울림 멤버인 김창완은 신곡 ‘시간’에서 시를 낭송하듯 인생을 노래한다. 김창완이 1981년 낸 곡 ‘청춘’이 27세의 시간이라면, ‘시간’은 그의 나이 예순 둘에 쓴 ‘청춘’ 같은 노래다. 김창완은 “임종을 앞뒀을 때 내 아들이나 가까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강기석(30)씨는 “의지하고 싶은 어른이 내게 들려준 삶에 대한 잠언 같아 ‘시간’을 자주 듣게 된다”고 말했다.
대중문화에 ‘은빛 물결’이 넘실거린다. 최근 60대 이상 노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드라마가 잇따라 제작돼 ‘실버 콘텐츠’가 방송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디어 마이 프렌즈’ 를 비롯해 이순재, 강부자가 극의 중심에 선 SBS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 거야’가 대표적이다.
두 드라마에서 젊은 배우들은 오히려 ‘찬밥 신세’다. 고현정과 조인성(‘디어 마이 프렌즈’), 신소율과 조한선, 남규리(‘그래, 그런거야’) 등은 두 드라마에서 노배우들 뒤에 한 발짝 물러 서 조연 역할을 한다. 젊은 연예인들의 성지처럼 여겨졌던 예능프로그램에도 은빛 물결이 스며들었다. JTBC는 선글라스를 쓴 김영옥과 양희경 등이 금목걸이를 차고 거친 랩을 하는 ‘힙합의 민족’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해 새 바람을 일으켰다. 박근형과 백일섭 등이 해외로 여행을 다녔던 예능프로그램(tvN ‘꽃보다 청춘’)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은빛 예능 실험이다. 가요계도 1970년대를 풍미했던 노가수 정미조와 박인희가 지난달 잇따라 컴백하며 ‘은빛 물결’을 이끌고 있다.
시대상에서 은빛 물결의 발원지를 찾을 수 있다.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는 지금 대중문화시장에서 주요 문화 소비층으로 떠올랐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 CJ CGV는 45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시니어 전용 멤버십 프로그램 ‘노블레스’를 운영 중이다. 1980년대 취업해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자란 이들은 ‘세시봉’을 중심으로 한 포크음악 열풍을 이끌며 문화적 풍요로움도 누렸다.
남의 시선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스스로를 ‘올드 보이’(Old boy)가 아닌 ‘하프 보이’(half boy·반 젊은이)로 여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실버 세대를 가리켜 버니스 뉴가튼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교수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역동적인 노년)로 봤다. 사회·문화 전반에 활동적인 노년층의 등장으로 이들을 향한 문화 콘텐츠 제작이 잇따르고, ‘액티브 시니어’의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이 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런거야’에서 이순재의 취미는 노래방에서 남 눈치 안보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일이다. ‘디어 마이 프렌드’에서는 시골이 아닌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의 자립에 대한 얘기 등을 다룰 예정이다. 이승한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연예계는 유독 조로증이 심해 그간 50대만 되면 주변 인물로 밀려 나왔다”며 “‘디어 마이 프렌즈’ 등에서 욕망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이들을 사회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다루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해석했다.
20~30세대의 ‘은빛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 흥미롭다. 데이터 분석회사 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 따르면 ‘힙합의 민족’은 3월 넷째 주 기준 온라인 화제성(트위터ㆍ블로그 등 반응)이 KBS2 ‘해피투게더’와 ‘1박2일’ 시즌3보다 높았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영화 ‘검은 사제들’이 중장년층 입장에선 1970년대 나왔던 ‘엑소시스트’와 다를 게 없다지만, 20~30세대엔 새로운 소재라 흥행에 성공했고, ‘응답하라’ 시리즈의 복고 열풍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장년층에겐 낡고 익숙한 얘기라도 20~30세대에겐 새로운 모습일 수 있어 흥미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20~30세대가 사회적 어른들을 갈망하면서 대중문화 속 화려하고 권위 있는 중장년을 삶의 멘토처럼 여기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중문화의 ‘노익장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20~30대가 보수화 돼 ‘은빛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는 의견이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절벽사회’ 등 자신에 닥친 사회ㆍ경제적 위기 속에서 스스로 변화를 모색할 수 없게 되자 권력층이 된 기존 중장년층의 모습에서 위안과 안주를 얻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기존 386세대가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한 것과 달리, ‘금수저ㆍ흙수저 계급론’에 빠진 현 20~30세대는 대중문화 속 활동적인 노장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은빛 콘텐츠’ 바람에 대해 방송사는 심란한 모습이다. ‘은빛 콘텐츠’ 들이 공익적 가치를 인정 받으며 사회적으로 화두는 되고 있지만, 해당 프로그램의 광고 판매가 매우 부진한 탓이다. 지상파방송의 한 예능 PD는 “중장년의 예능프로그램이 시청률은 잘 나오는데도 젊은 스타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체들의 광고가 도통 붙지 않는다”며 “방송사 안에서 중장년층을 내세운 프로그램을 섣불리 내놓으려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방송관계자도 “SBS가 ‘그래, 그런거야’를 편성한 건 작가가 김수현이기 때문”이라며 “노희경 작가의 신작도 케이블채널로 간 것처럼 지상파가 실버 콘텐츠를 더 내놓을지는 의문”이라며 안타깝게 바라봤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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