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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도 북촌이 있어요

입력
2016.05.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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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촌마을 전경.
제주 북촌마을 전경.

한적하면서 정겨운 바닷가 마을

훈훈한 인심의 사람사는 맛 그윽

제주의 봄이 무르익고 있다. 제주를 몇 번 다녀간 사람들은 번잡한 관광지가 아닌 제주다운 곳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 분들에게 먼저 권하는 곳이 바닷가 마을 ‘북촌’이다. 사람들은 놀라며 제주에도 북촌이 있어요? 되묻는다. 물론이다. 북촌은 제주시의 동쪽 바닷가 마을로 시끌벅적한 함덕과 월정리 사이에 있는, 조용하고 한적하면서도 정겨운 곳이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의 배경이기도 하고 낚시터로도 꽤 명성이 나 있다.

대문 한쪽을 늘 열어놓고 있는 김홍찬씨 댁.
대문 한쪽을 늘 열어놓고 있는 김홍찬씨 댁.
김홍찬씨 댁 연못.
김홍찬씨 댁 연못.

북촌리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바다방향으로 두어 집 내려가면 늘 대문 한쪽이 열려 있는 집이 있다. 북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김홍찬(76세)씨 댁이다. 홍찬씨는 어려서부터 동네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내 일처럼 돌봤다. 그러나 항상 배가 고팠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던 시절, 홍찬씨를 붙잡고 싶었던 동네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집터를 사 주었다. 집 지을 돈이 있을 리 없었던 홍찬씨는 1944년부터 7년 여간 일본을 오가며 돈을 벌었다. 해방 전후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위험한 공장 일 뿐. 플라스틱 성형공장에서 독한 냄새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배려심, 잘 살 거나 못 살거나 꽃을 좋아하고 정원을 가꾸는 일본사람들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한다. 홍찬씨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집을 지으면서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고 동네사람들이 오가며 쉬어 갈 수 있게 대문 한쪽을 늘 열어놓고 다녔다.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키우면서도 집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홍찬씨는 살아온 이야기, 정원 가꾸는 이야기 들려주며 ‘나 살아온 이야기는 돈 내고 들어야 한다’ 며 웃으셨다. 사진 찍을 때에는 말도 가족처럼 함께 찍는다. 날 잡아서 저녁시간에 온다면 더 많은 얘기 들려줄 수 있단다. 우리 근현대의 생활사가 녹아 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채록하는 일이 절실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제주 북촌마을 북촌9길빵집.
제주 북촌마을 북촌9길빵집.

홍찬씨 사연을 알게 된 건 ‘북촌 9길 빵’집 주인, 김승희씨 덕분이다. 언젠가 빵을 사러왔다가 앞집 열려 있는 대문으로 언뜻 보이는 정원이 예쁘다 했더니 말 키우는 삼춘(제주에선 동네 어르신을 삼촌이라 함)이라며 나중에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란다. 홍찬씨와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승희씨가 커피를 내왔다. 홍찬씨는 ‘우리 족은년(작은 딸)’이라며 반긴다. 동네 할머니 한분이 치과 다녀오던 중이라며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홍찬씨 내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할머니의 안색을 살핀다. 사람 사는 냄새가 이런 거구나. 훈훈한 모습들이다.

친정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는 승희씨의 ‘북촌 9길 빵집’은 좋은 유기농 재료와 천연 발효빵을 고집하면서 하루 팔 수 있을 만큼만 만든다. 가격도 착한 편. 빵집을 연 지 1년이 안됐는데 그 사이 소문이 많이 났는지 오후가 되면 빵이 거의 동이 날 때가 많다. ‘맛있는 빵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는 걸 좋아하는’ 승희씨. 출입구 유리문에 쓰여진 ‘빵’이란 커다란 글자에 추억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난다. 돈을 쓰고도 참 기분 좋아지는 빵집이랄까. 승희씨는 북촌에 빵집을 연 게 알지 못할 인연이 있는 건 아닌가 싶단다. 4ㆍ3의 상처가 깊은 마을에 자기가 할 역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어르신들의 삶 하나하나가 살펴진다는 것이다. 제주는 외지인이 들어와서 맘 붙이고 살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작은 빵집을 열어 동네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는 승희씨 모습이 참으로 어여쁘다.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돌아 포구로 내려서면 헤엄치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모양이 물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다려도’다. 2개의 섬과 10여 개의 여로 형성된 이곳엔 작은 정자가 있고 겨울엔 수천 마리 원앙새의 월동이 장관을 이룬다. 북촌에선 잠시 시간을 내어 낚시를 즐겨 보시라. 마을 입구에 낚시점에서 도구를 빌릴 수 있고 포구엔 언제든지 낚시 배가 대기하고 있다.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 만큼 줄낚시 하나로도 한 양동이를 금방 채웠던 적도 있으나 지금은 예전보다 못하다고 한다. 그래도 여름 제철엔 참돔, 돌돔 등 고급 생선들을 잡을 수 있고 물이 들어올 때면 소쿠리 하나만 들고 나가도 멸치를 건져 올릴 수 있다. 포구 근처 ‘방모루 식당’이 있는데 낚시로 건져 올린 생선을 가져가면 회도 떠주고 매운탕도 끓여준다. 낙조 아래 낚시꾼 몇이 포구에서 여유롭게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림 같다.

북촌마을의 일몰. 방파제 위로 낙조가 붉게 물들었다.
북촌마을의 일몰. 방파제 위로 낙조가 붉게 물들었다.
돌하르방 공원.
돌하르방 공원.

북촌 포구를 돌아 한라산 방향으로 잠시 올라가다 보면 ‘돌하르방 공원’이 나온다. 돌하르방 공원은 제주의 곶자왈 지역의 지형을 이용해서 숲을 거닐며, 재미있게 창작한 현대적인 감각의 돌하르방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제주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전통적인 돌하르방 48기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김남흥 작가의 예술 정원이 자연과 함께 있는 곳인데 정성을 들인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 오랜 시간 돌하르방처럼 묵묵히 공원을 만들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제주 전역에 이런 저런 사설 박물관, 공원들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 있을 곳이 몇 곳이나 될까. 돌하르방 공원은 자연과 어우러진 돌의 표정들이 살아 있어 공원을 나설 때쯤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북촌에는 역사 유적지도 꽤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 ‘고두기엉덕’이 있고 고려시대의 방어유적인 환해장성, 그리고 오래된 현무암 등대 ‘도대불’도 포구 가까이서 흔적을 볼 수 있다. 도대불은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불을 밝히는 등대 역할도 했지만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마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청년들이 밤마다 깨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북촌의 4.3 유적지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4.3 당시 마을 사람 수백 명의 목숨이 희생된 북 초등학교, 너분숭이와 애기무덤, 순이삼촌 기념관이 있다. 슬프고 아린 상처를 딛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기에 외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는 사람 마다 않고 식구처럼 맞아준다. 봄바람 속에 갯내음 맡으며 천천히 돌아보는 북촌은 마을을 굽어보며 지키고 서 있는 고목나무처럼 오래 여운이 남는 곳이다.

허순영 제주착한여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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