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성조기로 온몸을 감싼 듯한 캡틴 아메리카의 복장은 그 자체로 선입견을 갖게 한다. ‘세계 경찰로서 미 제국’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 같다는 인상. 애국심 충만한 미국 시민이 아니라면 쉽게 호감을 갖기 어려운 캐릭터다. ‘슈퍼 세럼’의 영향으로 초인이 되긴 했지만 강인한 육체와 방패를 빼면 왠지 슈퍼영웅으로서 초능력도 다른 영웅에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인상 때문인지 마블의 여타 슈퍼영웅에 비해 캡틴 아메리카는 해외에서 인기가 매우 낮은 편에 속했다. 캡틴을 다룬 첫 번째 단독 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의 국내 개봉 제목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빠지고 ‘퍼스트 어벤저’만으로 극장에 걸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캡틴을 다룬 두 영화 ‘퍼스트 어벤저’와 ‘윈터 솔저’가 개봉하고 ‘어벤저스’ 1, 2편이 모두 국내에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면서 어벤저스를 이끄는 캡틴에 대한 관심도 급격히 높아졌다. 적어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보여주는 캡틴의 모습은 ‘미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정의를 수호하는 진정한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봉 1주일 만에 500만명이 봤다는 ‘시빌 워’에서 그는 다시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른바 ‘소코비아 협정’을 계기로 시작된 아이언맨과 갈등이 오랜 친구 버키 반스에 대한 입장 차이로 폭발해 영웅들끼리 대규모 싸움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아이언맨의 내적인 동기가 좀더 자세히 묘사되면서 캡틴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는 감상 평도 나오고 있다. 과연 캡틴 아메리카가 이 영화에서 변한 것인가. 그는 어떤 정의를 추구하길래 아이언맨과 맞선 것인가.
※주의: 이 기사에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및 관련 마블 영화의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퍼스트 어벤저, 캡틴 아메리카의 탄생
캡틴 아메리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3월에 나왔다. 아직 미국이 공식 참전하지 않았지만 세계는 나치라는 ‘악(惡)’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당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겉모습과 명칭이 보여주는 그대로 미국을 상징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주적은 나치와 나치의 초인 레드 스컬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의 소망대로 만화 속에서 나치를 쳐부수며 전쟁 중인 미국의 선전대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화 ‘퍼스트 어벤저’에서 나타나듯 캡틴이 상징하는 것은 시대와 함께 변했다. 영화 속에서 캡틴은 미국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 판매용 선전부대에 동원되지만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한다. 초창기 원작만화 속 캡틴의 ‘흑역사’를 부정하지는 않되 캡틴이 진정으로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캐릭터와 내용은 원작 만화를 토대로 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버전의 만화 속에서 형성된 캐릭터의 성격을 종합해 인물의 성격을 새롭게 구성하고 스토리도 다시 만들어 만화보다 덜 산만하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나 조직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정의인가
캡틴 아메리카가 탄생한 제 2차 세계대전 시기는 선과 악이 분명하게 갈린다. 나치는 거대한 악이었고 이를 무찌르는 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수십년 동안 냉동상태에서 깨어난 캡틴은 혼란을 겪는다. 국가가 곧 정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캡틴은 어벤저스를 이끌며 실드(세계안전보장이사회 소속 국제안보기관)와 협력해 악인들을 무찌른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 ‘윈터솔저’에서 그는 실드가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실드는 ‘테러범들을 찾아내 실제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싹을 자르겠다’며 1분에 타깃 1,000개를 제거할 수 있는 ‘프로젝트 인사이트’를 가동하려고 한다. 하지만 캡틴은 “벌이란 잘못을 저질러야 주는 것”이라며 “(아직 무고한 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지켜주겠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공포”라고 반대한다.
영화 속 캡틴은 이때부터 조직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믿고 있었던 셈이다. 원작 만화 속에서 캡틴은 영화보다 훨씬 앞선 1964년에 냉동상태에서 깨어나지만 국가와 조직의 말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비슷하다.
만화 속 캡틴은 워터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음모와 맞선다. 여기서 적은 ‘미국의 원칙을 되찾는 위원회’(CRAP)다. 이는 ‘닉슨대통령 재선위원회’(CREEP)를 흉내낸 것으로 CRAP의 리더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
캡틴은 미국 정부가 더 이상 착한 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성조기와 법을 지키기 위해 보냈다. 내가 덜 싸우고 더 질문했어야 했는데!” (관련기사)
소코비아 협정을 반대한 이유
이번에 개봉한 영화 ‘시빌 워’의 원작 만화에서 슈퍼 영웅 100여명은 아이언맨 팀과 캡틴 아메리카 팀으로 나뉘어 제목 그대로 내전 수준의 전투를 벌인다. 대립의 원인은 ‘초인등록법안’이다. 영웅들이 악을 물리치겠다며 싸우는 바람에 죄 없는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데 이를 규제하기 위해 영웅들이 모두 복면을 벗어 정체를 드러내고 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법안이다.
영화 ‘시빌 워’ 역시 영웅과 악인의 전투 중 민간인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발표된 ‘소코비아 협정’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 협정은 영웅을 유엔에 속한 하부조직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악동 이미지였던 아이언맨은 영웅들의 싸움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를 맞닥뜨리고 괴로워하며 협정에 찬성하고 오히려 선한 이미지였던 캡틴이 강력 반대한다. 이 같은 입장은 앞서 살펴 본 캡틴의 정의관이나 조직관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므로 큰 힘을 가진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하이드라와 맞서 싸웠고, 죽마고우인 버키마저 하이드라의 노예가 되어 원치 않은 악행을 저지른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협정에 서명하면) 진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지 못할 수도 있어”라는 캡틴의 대사는 엄청난 힘을 지닌 영웅들이 건강하지 않은 목적을 지닌 조직 아래 놓일 때 오히려 슈퍼 빌런(villain)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캡틴 아메리카의 정의관은 설득력 있다. 스파이더맨의 유명한 대사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본인의 양심에 따라 져야 한다. 큰 힘을 가진 이가 어떤 조직에 소속됐을 때 책임을 조직에 돌려 회피하거나 조직의 뜻에 따라 양심에 따르지 않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원작 만화 속 캡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에도 충성하지 않는다, 꿈(dream)을 제외하면.”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든 양심과 조직 논리 사이에서 번민할 때 한번쯤 생각해 볼 말이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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