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마다 기억 또는 추억에 잠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떤 잔상인데 머릿 속에 간직한 느낌을 다시 끄집어내면 코끝을 스치던 그때 그 냄새가 떠오른다. 아주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상념일 뿐이지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여기 10년 간 1,838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 연 평균 183권, 대략 이틀에 한 권 꼴로 읽은 셈이다. 한국 성인의 연 평균 독서량이 10권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하니 대단한 수치다. 그녀의 이름은 홍윤. 주로 활동했던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의 필명은 ‘물만두’였다. 홍윤은 작가도, 평론가도, 문학연구자도 아니었다. 그녀의 ‘일’은 책을 읽고 자신의 독서 경험을 타인에게 공유하는 것이었으며, 그녀의 ‘일터’는 알라딘의 리뷰 게시판 ‘서재’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알바 리뷰어’라고 불렀으며, 남동생이 붙여준 직업명은 ‘북 리뷰어’였다.
2016년 현재, 한국표준직업분류에는 ‘리뷰어’라는 직업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 가까운 미래에 북 리뷰어가 사회적 의미의 ‘직업’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물만두’ 홍윤을 ‘리뷰어’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홍윤이 생전에 가장 사랑했고, 전력을 다했던 일이 바로 추리소설을 중심으로 한 장르문학에 대한 ‘리뷰’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신 근육의 힘이 풀리는 희귀병 ‘봉입체근염’으로 오랫동안 투병했으며, 그녀의 방대한 리뷰 작업이 힘겨운 투병 생활 중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리뷰어 홍윤을 이해하기 위한 부가적 정보일 뿐이다.
“다들 읽는 추리소설을 감히 깎아내리다니”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대부분 추리소설만을 읽는데 감히 추리소설을 깎아 내릴 리가 있나. 그래도 깎을 때가 있다면 출판사의 무성의한 오타 남발, 잘못된 제본 등등 때문이다. 우리나라 작가들에게는 조금 짜다. 내 자식은 매를 한 대 더 때리는 심정으로. 그것뿐이다.”
홍윤은 서른 두 살이 되던 2000년 3월부터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서재’에서 ‘물만두’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에서 따온 닉네임이라고 한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이 오픈한 것이 1999년 7월이니 그야말로 1세대 리뷰어인 셈이다.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발병한 봉입체근염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었던 홍윤에게 있어 알라딘 서재에서의 활동은 세상과의 만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도권 문학에서 비평은 ‘제2의 창작’으로 여겨져 왔다. 전통적으로 비평가의 역할은 자신의 언어로 작품을 재구성함으로써 작품에 기대되, 작품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 리뷰어의 역할은 비평가와 다르다. 북 리뷰어는 독자에게 자신의 독서 경험, 즉 UX(사용자 경험)를 공유한다. 이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지도를 제시하고, 길을 안내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북 리뷰어는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경험’을 보편화한다. 이는 문학(책)의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며,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이후에도 문학(책)을 읽는 일이 ‘흥미로운 경험’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온라인을 통해 독서 경험을 공유하려는 시도는 1990년대 초반 PC통신 시대의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의 서비스 상에서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인터넷 시대로 진입한 이후에는 ‘비평고원’과 같은 전문 리뷰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이곳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스타급 비평가, 서평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서점에 온기를 더하다
하지만 물만두 홍윤의 작업은 이들과는 다른 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비평고원이 문학이 ‘상품’으로서 유통되는 ‘문학시장’과 엄격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홍윤은 인터넷서점, 즉 문학시장의 복판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또한 문학작품에 대한 이론적 분석 작업에 주력했던 비평고원의 작업과는 달리, 홍윤의 리뷰는 주로 개인적인 독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공적 목적으로 유물(책)을 체계적으로 수집, 분류, 전시하는 박물관과 사적 동기에 의해 유물을 수집하는 개인 콜렉터의 차이라고 할까.
따라서 홍윤의 리뷰에서는 추리소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두드러진다. ‘혹여 별점 때문에 추리소설을 안 읽는 독자가 생길까봐’ 자신이 리뷰한 책에 대해 언제나 후한 별점을 주던 홍윤이지만,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내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는 심정으로’ 더 박한 별점을 주곤 했다.
그렇다면 홍윤은 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유독 애정을 쏟았을까? 그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 사이의 추리 대결이라는 장르적 매력에 매혹되었던 듯하다. 추리소설이야말로 홍윤이 세계를 바라보는 ‘창’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다룬 소설은 사회의 밝은 부분을 주로 드러내고, 악당을 다룬 소설은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주로 드러낸다. 그런데 추리소설에서는 선량한 시민, 악당, 탐정이 모두 등장해 사회의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따라서 추리소설이야말로 세계를 가장 폭넓게 조명하는 소설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했던 홍윤이 유독 추리소설에 애정을 쏟았던 무의식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동료들을 가져 보지 못했기에 어쩌면 여러분을 동료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만났다면 말도 못 붙였을 테지만…. 다른 사람들은 인터넷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내 인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이 생겨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눈 밝은 서점 주인의 역할을 대신
홍윤이 리뷰어로서 활동을 시작한 2000년대 초는 출판유통시장의 구조가 크게 변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와 ‘신무협’으로 대표되는 한국형 장르문학의 성장을 뒷받침했던 도서대여점 문화의 성장세가 한계에 도달해 하락해가고 있었고, ‘인터넷 교보문고’(1997년 서비스 시작), ‘yes24’(1999년 서비스 시작), ‘알라딘’과 같은 인터넷서점들이 생겨나며 동네 서점들이 경영난을 호소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오프라인에는 있지만 인터넷서점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책 추천’, 그리고 ‘입소문’이다. 속칭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와 ‘신무협’이 범람하던 시절, 책방(도서대여점) 주인의 추천 한 마디는 절대적이었다. 극소수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비슷비슷한 책들 사이에서 ‘괜찮은’ 작품을 독자 스스로 고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방의 거의 모든 책들을 섭렵한 주인의 추천은 ‘양품’과 ‘불량품’을 가르는 대단한 권위를 발휘했다. 학교와 동네에서의 입소문 또한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신간 혹은 인기 작품의 최신간이 나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곧 책방에서도 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책방과 동네 서점주인들, 그리고 그 단골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경험적 지식’이 곧 북 마케팅이고 홍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서의 유통 구조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상으로 옮겨오자 이러한 ‘경험적 정보’의 전달 고리에 공백이 생겼다. 구매자는 표지, 목차, 저자 등 극히 제한된 정보만으로 책 구매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판매자로서도 ‘상품’에 대한 추가적 정보를 예비구매자에게 전달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이 공백의 지점을 채운 것이 바로 홍윤과 같은 1세대 북 리뷰어들이었다. 그들은 한때 책방 주인이, 동네 서점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예비독자들에게 전파했고, 차가운 인터넷 공간에 인간의 온기를 더함으로써 가장 아날로그적인 ‘책’과 디지털 문화의 최첨단인 ‘온라인 상거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홍윤이 남긴 리뷰들과 신변에 관련된 잡다한 글들을 보면 책에 대한 애정에 앞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느껴진다. 직접적인 접촉이 부재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도 홍윤은 모니터 뒤에 있을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그녀가 알라딘 서재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 리뷰어들, 그리고 자신의 리뷰를 읽어 주는 독자들을 진정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그녀가 남긴 기록들에서 느낄 수 있다. 홍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터넷의 발달은 (몸이 불편한) ‘내 인생의 축복’이었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잣대로 리뷰한 독학자
이런 홍윤의 마음은 그녀의 리뷰를 애독하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던 듯하다. 홍윤은 2010년 12월 13일 영면에 들었지만, 여동생 ‘만순’씨가 관리하고 있는 고인의 서재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인이 남긴 추리소설 리뷰를 추려 엮은 책 ‘물만두의 추리 책방’(바다출판사ㆍ2011)은 지금까지도 입문자들에게 친절한 안내 지도가 되어 주고 있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그로 인해 다시 내 미래와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홍윤의 리뷰 작업에는 두 가지 일관된 원칙이 존재했다. 하나, 직접 읽은 책에 대해서만 쓸 것. 둘, 솔직하게 쓸 것. 수많은 사람들이 홍윤의 리뷰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 두 원칙을 끝내 고수해냈기 때문이다. 홍윤은 성실한 리뷰어로서 언제나 뚜렷한 주관을 견지한 채 책을 대했다. 그녀가 추리소설을 평하는 기준은 복잡한 이론이나 전문가의 분석이 아니라 수천 권의 독서를 통해 그녀 스스로 쌓아 올린 ‘경험적 잣대’, 그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힘든 투병 중에도 1,900여 건에 달하는 방대한 리뷰를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무협지의 고수가 운기조식(運氣調息)으로 한 호흡씩 단전에 기를 쌓아가듯,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한 권 한 권씩 성실하게 읽으며 쌓아 올린 내공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과 당당히 마주할 수 있도록 그녀를 지탱해준 것이리라. 어떠한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맨몸으로 책과 마주하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그 작업을 병마에 맞선 싸움과 동시에 해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홍윤을 진격의 독학자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홍덕구 근현대문학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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