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와 달리 제주에는 마을 숲이 드물다. 아름드리 나무라고 해봐야 마을의 정자 역할을 했던 ‘댓돌’의 팽나무가 대부분이고, 간혹 소나무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과거 제주에서 보호수로 여겨지는 나무는 마을에서 신성시했던 신당의 신목(神木)이 대표적이다.
신목은 마을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보호했던데 반해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비자나무숲)은 관아에서 강제로 보호조치를 취한 경우다. 인근 마을에 전해지는 금기어로 “비자는 구워 먹지도 말고, 볶아 먹지도 말고, 발로 밟지도 말라. 그러면 관습 벌른다”는 말이 있다. ‘관습 벌른다’는 말은 관아에 잡혀간다는 의미다. 또 비자나무를 땔감으로 태우지 말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비자나무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무였다.
그 결과 44만 8,000여㎡ 면적의 비자림에는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자나무 숲이 되었다. 가장 키가 큰 나무는 16m에 이르며 대부분은 11~13m 정도이다. 가슴높이 직경은 최고령목이 1.8m이며 나머지도 40~70㎝에 달한다. 지난 2000년 ‘새천년 나무’로 지정된 비자나무는 고려 명종 20년(1189)에 태어났다고 해서 비자림을 일명 ‘천년 숲’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자림이 보호가 잘된 또 다른 이유는 약재로서 공물(貢物) 대상이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했다. 일제는 이곳 비자 열매를 전부 일본으로 반출해 태평양전쟁 때 기름을 짜 비행기 연료로 사용했다고도 전해진다.
한방에서 비자나무 열매는 조충약이라 하여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박멸에 이용해 왔다. 또한 강장제로서 폐를 돕고 치질과 산기에 좋으며, 근골을 튼튼하게 하고 시력을 좋게 하는데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기침감기에 비자열매를 먹으면 효과가 있고 얼굴이 누런 사람에게도 좋다고 한다. 특히 대머리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 하나. 비자를 짓찧어 빗질하면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비자 세 알과 호두 두 알을 측백나무 잎 한 냥(37.5그램)과 함께 찧어 눈 녹은 물에 담가두었다가 이 물로 머리를 빗으면 탈모가 방지된다고 하니 보통 정성으로는 쉽지 않은 처방이다.
뿐만 아니라 비자나무는 강하고 탄력이 있어서 바둑판으로도 인기가 많았다. 비자나무 바둑판은 바둑을 둘 때 은은한 종소리가 난다고 할 정도로 최고로 친다.
주목과의 늘푸른나무로 난대성 식물인 비자나무는 이러한 이유로 마구 베어내 육지에서는 매우 희귀해졌다. 제주 비자림을 제외하면 남부지방의 일부 사찰 근처에만 남아있고, 한라산 중턱에서도 아주 드물게 자란다. 제주 비자림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과거 제주주민들이 ‘관습 벌른다’며 철저하게 지켜낸 덕분이다. 지금의 불편을 다소 감수하더라도 주변의 자원을 보호하면 후손들에게는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비자림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증거이기도 하다.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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