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이 극장가에서 흥행몰이를 할 태세다. 지난 11일 오후 5시 개봉해 12일까지 48만5,578명이 봤다. 500만 관객도 가능하다는 예측이 조심스레 나온다. 데뷔작 ‘추격자’부터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대중의 눈길을 잡았던 나 감독은 논쟁적인 인물이다. 매번 어두운 곳의 암울한 인간 군상이 펼쳐내는 잔혹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상업적인 수완을 발휘해왔다. ‘추격자’는 507만1,619명이 찾았고, ‘황해’는 226만512명이 관람했다.
영화의 완성도도 높다. 2013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기대되는 후배 감독으로 나 감독을 꼽았다. ‘추격자’는 2008년 칸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에 초대됐고, 2011년 두 번째 영화 ‘황해’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했다. ‘곡성’이 올해 비경쟁부문에서 상영되면서 세 작품 모두 칸을 찾게 됐다. 대중적인 지명도가 높으면서도 예술적인 면에서도 인정 받는 매우 보기 드문 감독인 셈이다.
나 감독의 영화들은 스릴러를 근간으로 한다. 사람들의 거친 사연 속에서 서스펜스를 빚어낸다. ‘곡성’은 두 전작보다 진화했다. 서스펜스 위로 공포가 포개지면서 영화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졌다. ‘곡성’은 앞선 영화들과 전혀 다른 소재이고, 화법도 크게 달라진 듯하지만 나 감독의 세계관은 변함없다. 고립된 공간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 스크린에 배어 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주변부
나 감독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듯한 곳에 불우한 사람들을 던져놓는다. ‘추격자’의 미진(서영희)은 윤락녀다. 영화는 미진의 불우한 사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나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내몰려 거리로 나섰다. 미진은 생물적으로 존재하나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진의 동료들이 이미 실종돼 살해됐으나 사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에게 닥친 불행은 ‘황해’에서도 반복된다. 중국 옌볜에 거주하는 구남(하정우)은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떠난 아내를 찾아 나서기 위해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돈을 받고 뜻하지 않게 살인에 관여하게 되고, 함정에 빠진 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구남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숨통을 조여 오지만 구남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재중동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가운 시각은 구남으로 대변된다.
‘곡성’의 중심인물인 종구(곽도원)도 큰 차이가 없다. 그는 경찰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으나 초자연적인 재앙에 빠진 뒤 그를 도와줄 이웃은 없다. 아이가 괴질에 걸리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도 아빠인 종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속의 힘에 기대는 정도다. 마을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기이한 연쇄 살인사건과 괴질로 잇달아 목숨을 잃어도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하지 못한다. 경찰서와 병원이라는 근대의 성취물들이 시골마을까지 들어와 있으나 무기력하기만 하다. 21세기라는 첨단의 시대에도 시골은 과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다.
주변부 인생들은 그들이 머무른 공간에 의해 고립무원의 상황이 더욱 도드라진다. 미진이 실종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곳은 서울 마포구의 주택가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나 도시화의 상징인 아파트의 휘황한 이미지는 아니다. 퇴락한 동네는 어둡고 으슥하다. 서울이라는 중심부에 놓인 변두리다. 미진의 처참한 죽음은 사람들의 관심 밖인 공간에서 더욱 처연하게 나가온다.
구남이 생활하는 옌볜도 중심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옌볜은 완전히 중국이라 할 수 없는 공간이면서 한국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중국과 한국이라는 정치체제가 만나는 교집합 같은 공간이 구남이 처한 고립을 더욱 강조한다. 아내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와서도 구남은 변두리 또는 빈 공간을 전전한다. 아내가 살던 경기 안산시의 썰렁한 단칸방, 도망을 다니면서 들르게 되는 폐가 등이 구남의 고립감을 강화한다.
‘곡성’의 시골마을도 외부와 왕래를 하나 교류가 차단된 이미지가 강하다. 도시에서 형사가 와 살인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의사들이 괴질환자들을 치료하나 마을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어간다. 미디어는 전남 곡성군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죽음을 독버섯 탓으로 돌린다. 명확한 원인 규명도 못하고 사태를 해결할 수도 없다(초자연적 현상에 의한 죽음이기에 애초 해결이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공포의 공간에서 운명처럼 죽어간다.
응답하지 않는 신
나 감독의 세 작품은 종교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고통 당하는 자들을 왜 외면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화면 곳곳에 심는다.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영민(하정우)은 과거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반사회적 인물이 됐는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영민을 쫓는 중호(김윤석)를 통해 영민의 정신세계를 가늠할 수 있다. 영민의 어둡고 좁은 단칸방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 재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영민은 한때 종교에 의지했다가 결국 신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된 듯하다. 낮은 학력, 경제적인 어려움, 희망 없는 일상이 아마 영민을 살인의 쾌락으로 밀어 넣은 게 아닐까.
‘황해’에선 특정한 종교적 이미지가 드러나진 않는다. 하지만 구남의 고난이 구도의 길처럼 보인다. 자신을 배신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구남은 아내를 찾아 고향으로 데려가고 싶어한다. 아내가 내연남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식도 그는 믿지 않으려 한다. 구남은 범죄조직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면서 아내의 혼이라도 함께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내의 사진과 함께 밀항선에 탄 그의 모습은 종교적 행위처럼 엄숙하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곡성’은 좀 더 구체적으로 종교에 접근한다. 누가복음 24장을 인용하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다. ‘곡성’은 샤머니즘과 엑소시즘을 뒤섞으며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죽음들을 전시하는데 신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악마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종구의 주장에 대해 지역 성당의 신부는 이성에 기댄 말만 되풀이한다. 악마의 존재를 깨닫게 된 이는 결국 신부가 아닌, 신부 수련을 받고 있는 부제 양이삼(김도윤)이다. 퇴마 능력은커녕 제대로 신부도 아닌 양이삼이 거대한 악에 맞서 종구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정부는 없었다
‘추격자’와 ‘황해’, ‘곡성’은 사회적 제도와 국가기관의 무기력을 꼬집기도 한다. 영민의 존재를 깨닫고 그를 끝까지 추격하는 사람은 전직 형사 중호다. 서울시장 경호 업무 등 허드렛일에 바쁜 경찰은 정작 연쇄살인범 수사에서 뒷북을 친다. 영민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입증하지 못해 영민을 풀어주고, 미진의 죽음이 이어진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공권력을 대신하는 중호도 딱히 정의감이 넘치지는 않는다. 돈벌이에 활용되는 여자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 그의 의도치 않은 정의구현이 시작된다. 사적 구제가 공권력을 대신하는 셈이다.
청부살인을 주요 소재로 삼은 ‘황해’에서도 경찰은 범인의 실체를 처음부터 그리지 못한다. 구남은 누명을 쓴 채 경찰과 범죄조직으로부터 동시에 쫓긴다. 애초부터 제도와 법 밖에 있는 구남의 처지가 억울한 상황을 증폭시킨다. 밀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구남이 사고사를 가장한 살인으로 최후를 맞는 영화 결말부는 법과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한국사회를 고발한다.
‘곡성’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며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에둘러 비판한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고위직 공무원 하나 시골마을을 찾지 않는다. 영화는 굳이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경제력이나 정치력을 지니지 않았고, 딱히 표밭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저 무지렁이일 뿐이다.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종구 가족이 의지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인 무속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무명(천우희)이 사람들을 도우려 하나 비극은 그치지 않는다.
경찰이라는 종구의 직업도 꽤 상징적이다. 그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도 현장에 늦게 출동한다. 노모의 강요에 못 이긴 척 아침을 먹고 아이 등교까지 도와준다. 사건 현장에 늦게 도착하고는 아이가 아파서라고 둘러대지만 관객은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딱히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가로운 시골을 묘사하기 위해 종구의 근무 소홀을 보여주기도 하나 영화는 제 때 발동되지 않는 공권력을 희화화하기도 한다. 동네 친구들과 낮술을 먹으며 근무태만을 보이던 종구도 결국 악의 연쇄작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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