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53) 감독의 마음 속엔 처음부터 배우 김민희가 있었다. 영화 ‘화차’와 ‘연애의 온도’를 통해 특유의 차분함과 느긋함으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김민희의 매력이 박 감독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화 ‘아가씨’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캐스팅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김민희가 1순위였다. 내면의 복잡한 심리와 함께 육체적인 관계까지 보여줘야 하는 ‘아가씨’의 동성애 연기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15일 오전(현지시간) 프랑스 칸의 한 호텔에서 만난 박 감독은 “김민희는 첫 번째 선택이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박 감독은 김민희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고 “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기술된, 농도 짙은 동성애 장면에도 김민희는 ‘OK’ 사인을 보내며 도전했다.
“‘화차’와 ‘연애의 온도’를 보면서 김민희를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충격적일 만큼 성장한 배우니까요. 김민희의 초기작 ‘서프라이즈’(2002)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이가 현재의 김민희를 떠올리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박 감독은 갈수록 연기력을 인정받는 김민희를 두고 “타고난 천재가 아닌 성장, 노력하는 배우”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 역시 처음 두 작품이 ‘폭망’(폭삭 망하다의 준말)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김민희처럼 노력하는 점을 높이 사고 좋아한다”고 밝혔다. 박 감독은 데뷔작으로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을, 두 번째 장편영화로 ‘3인조’(1997)를 내놨으나 흥행에서 크게 실패한 이력이 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아가씨’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게 된 귀족 가문의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아가씨를 유혹해 돈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 백작의 계략으로 아가씨에게 접근하게 되는 소매치기 출신 하녀 숙희(김태리)가 각각 서로를 속고 속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박 감독이 “내 안의 여성성을 드러냈다”고 할 정도로 영화 ‘아가씨’는 아가씨와 하녀의 변화무쌍한 내면을 밀도 있게 조명했다. 박 감독의 전작 ‘친절한 금자씨’와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아가씨’의 여성들도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이채롭다. 박 감독은 “집에 여자가 두 명(아내와 딸)이라서 그런 영향이 영화 ‘스토커’에서 모녀로, ‘아가씨’에서 두 여성으로 표현됐다”며 “여자에 대해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탄하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보통의 주류 상업영화에서 못하는 시도들을 해왔다”고 말했다.
“제가 그리는 여성들이 강인해 보이면서 잔인한 면도 가질 수 있어요. 때로는 굉장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도 있죠. ‘아가씨’에서도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히데코가 백작에게 새로운 하녀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도 잔인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김민희의 표정 연기는 최고였습니다.”
‘아가씨’는 박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행복한 결말을 품고 있다. 잔인하고 변태적인 행위가 세세히 묘사되기도 하나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과는 다른 결로 끝을 맺는다. 박 감독은 “(칸에서의) 상영이 끝나고 나올 때도 상업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상업영화라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부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수상) 기대는 전혀 안 한다”며 “다시 봐도 영화제용 영화 부류에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은 ‘아가씨’의 강도 높은 정사 장면에 대해 “친밀하고 부드럽고 대화에 가까운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다 “며 “영화에 등장하는 정사 장면치고는 대화가 많다”고 밝혔다. “히미코와 숙희가 서로 속이면서 안 그런 척, 순진한 척 하면서 관계를 시작하나 결국에는 자기들 감정에 충실한 단계로 넘어간다”고도 설명했다. 박 감독은 신인 김태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뽑았다”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그렇게 말해주니 좋다”고 말했다.
칸=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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