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요구에
보훈처, 극단 보수 편승해 거부
청은 사실상 조장ㆍ묵인 행태
야권 “박승춘 처장 해임” 반발
새누리도 “유감”.. 다시 ‘대결 정국’
국가보훈처는 16일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으로 부르는 기존 방식을 유지키로 했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 지도부간 회동에서 이 노래를 제창 또는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달라는 야권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여야 협치(協治)의 시금석으로 여겨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무산되면서 여소야대의 20대 국회는 시작부터 갈등과 대결로 치닫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즉각 “협치를 거부하는 것”이라며 반발했고, 새누리당도 “유감”을 표명하며 재고를 요청했다.
정치권이 모처럼 조성한 협치 분위기를 걷어찬 것은 국가보훈처와 청와대였다. 보훈처가 보수 일각의 흑색선전에 가까운 주장을 검증 없이 부풀렸고, 청와대는 사실상 이를 묵인한 결과다. 보훈처는 보훈단체를 동원해 여론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보훈처는 이날 기존 합창 방식 유지를 결정하면서 “찬반 양론이 첨예하게 나뉘어져 제창 시 또 다른 갈등이 유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2개 보훈단체들이 공동성명을 통해 제창이 결정되면 5ㆍ18 행사를 보이콧하겠다고 밝힌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린 한 보훈단체 관계자는 “우리는 특별한 입장이 없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라며 “보훈처가 보훈단체 지원금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정 보훈단체가 성명을 주도하고 나머지 단체들이 마지못해 따라간 것인데, 그 배후에 보훈처가 있다는 얘기다.
보훈처가 제창 반대 의견으로 제시한 것도 그간 보수 일각에서 주장해온 극단적 내용들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마치 ‘사회주의 혁명’을 부추기는 노래이며 ‘임’도 김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란 유언비어성 주장을 검증 없이 소개한 것이다. 작곡가 김종률씨 등이 여러 차례 밝혔듯이 이 노래는 5ㆍ18 당시 광주에서 희생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하기 위해 1981년 만들어진 곡이다.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 퍼진 주체사상과는 시기적으로 무관하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도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김일성 찬양곡이란 유언비어가 확산돼도 이를 적극 막지 않고 오히려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보훈처는 “1991년 5ㆍ18을 소재로 제작한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돼 ‘임’과 ‘새날’의 의미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도 반대 논리로 제시했다. 하지만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해 “이걸 북한이 악용했다고 해서 우리가 못 부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노래를 제창 방식으로 바꾸더라도 법적 강제는 아니어서 사실상 합창과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작은 차이를 둘러싼 이념적 편견을 해소해야 할 정부와 청와대가 오히려 묵인ㆍ방조하면서 논란은 보수, 진보의 갈등으로 증폭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협치로 정국을 풀기 보다는 여전히 보수 지지층에 의존하면서 협치 시늉만 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제창 결정시 대통령이나 총리가 이를 따라 불러야 하는 데 대한 거부감 때문에 윗사람 심기 보호 차원에서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온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박승춘 보훈처장에 대한 해임촉구결의안을 발의키로 했다. 협치의 첫 단추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해묵은 이념 대결의 척도로 되돌아간 것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