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표 줄면 손실” 밴대리점 요구에
금융위 중재로 분담 합의했지만
분담률은 못 정한 채 시행 발표
카드사, 조정 협상 요청 일축
금융위도 “중재 계획 없다” 뒷짐
지난 6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회사 인근 꽃집에서 카네이션 꽃바구니 두 개(각 2만2,000원)를 카드 결제한 장모(32)씨는 양손에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 꽃집에서 전자서명패드에 서명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5만원 이하는 무서명 거래가 시행된다고 하더니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박모(58)씨는 요즘 서명을 요구하면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손님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카드사와 밴(VAN)사가 시스템조차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고 전면 시행 발표부터 하면서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달 1일부터 5만원 이하 카드결제액에 대해 서명을 생략하는 무서명 거래가 실시됐지만 여전히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치고 있다. 전표수거 수수료 분담을 둘러싼 카드사와 밴사의 갈등으로 가맹점의 단말기와 서버 교체 작업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서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신용카드밴협회는 지난 9일 여신금융협회에 전표수거 수수료 조정 협상을 진행하자는 공문을 보냈다. 박성원 한국신용카드밴협회 사무국장은 “밴대리점이 받는 전표수거 수수료를 6원(13%) 낮추기로 합의한 것 이외에 나머지를 어떻게 분담할지 정해진 바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지난달 20일 카드사ㆍ밴사ㆍ밴대리점이 마련한 합의문에는 수수료 분담률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카드사가 전표수거 수수료의 50%, 밴사가 나머지 37%를 밴 대리점에 지불하기로 큰 틀에서 합의했다”며 “이미 합의한 사안인 만큼 카드사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의무도 없다”고 반박했다.
갈등의 핵심인 전표수거 수수료(건당 30~40원)는 전표 매입ㆍ승인중계 등 카드 결제 시 카드사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대가로 받는 밴 수수료의 일부다. 밴사는 카드사로부터 받은 밴 수수료 중 승인중계 수수료를 갖고, 전표수거 수수료는 해당 업무를 위탁한 밴대리점에 지급해왔다. 무서명 결제 도입으로 수거할 전표가 크게 줄어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될 위기에 놓이자 밴대리점은 “단말기 설치ㆍ수리, 가맹점 모집 등 그간 비용을 받지 못했던 서비스 수수료를 보전해달라”고 요구해왔다. 5만원 이하 결제는 전체 카드 결제의 84%를 차지한다. 결국 카드사ㆍ밴사ㆍ밴대리점은 금융위원회 중재 하에 연초부터 4차례 격론을 벌여 카드사와 밴사가 수수료를 분담하는 조건으로 5만원 이하는 무서명으로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수수료 분담률을 정하지 못한 설익은 합의안은 결국 파행을 불러왔다. 논의 과정에 참여한 업계 관계자는 “카드사는 본인들이 제시한 방안대로 하겠다고 말했고, 영업이익 악화가 크게 우려되는 소형 밴사 3곳이 합의안에 이의제기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대형 밴사와 소형 밴사의 입장 차이, 카드사의 일방통행, 금융위의 어설픈 중재가 ‘말뿐인 무서명 거래’를 불러온 것이다.
양쪽의 의견 차이가 상당해 무서명 거래가 언제 보편화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금융위 관계자는 “카드사와 밴사가 수수료율을 조속히 정하기로 이미 합의한 사안”이라며 “이후부터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재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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