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던 여성 A(23)씨는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에게 흉기로 수 차례 찔려 사망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A씨를 추모하는 수천 장의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강남역 추모 물결이 SNS을 타고 번지면서 사람들이 몰려 한참을 기다렸다 추모의 말을 적고 자리를 뜨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SNS에는 해시태그 ‘#살아남았다’가 널리 쓰여졌다. ‘우리는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없었기에 살아남았다’는 뜻이었다.
온라인 추모 열기를 넘어 오프라인으로 넘어온 추모 열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일에는 대학가에도 #살아남았다는 키워드를 넣은 대자보가 붙었으며 21일에는 다음카페 ‘여성혐오범죄반대추모집회카페’가 개최하는 추모 집회도 예정돼 있다.
그동안 여성이 살해 당한 사건은 매우 많았다. 하지만 추모 열기 등 이번 사건의 반응이 전례 없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여성학자인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에게 물었다.
불특정 여성 노린 강남역 사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추모 현상이 사회전반으로 퍼지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살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 유영철 이후다. 그 때에는 범죄 대상이 이른바 ‘보도방 여성’으로 특정돼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일상적인 자기 공포로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는 기제가 있었다.
반면 강남역 사건은 여성이라는 점 외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특정도, 구체적인 살해 동기도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좀 더 보편적인 자기 문제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사람들이 느낄 공포와 연민, 두려움 등이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여기에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점점 강화돼 온 여성 혐오가 어느 수준까지 비극적 사건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깨닫게 만들었던 것 같다.”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이미지화된 곳, 강남역
-살인사건이 외딴곳이나 주택가도 아닌 강남역에서 벌어진 것이 젊은 여성들에게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100만명이 넘는 강남역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익명성을 보장받고 누구나 접근 가능하지만 한편으론 특정하게 이미지화된 곳이기도 하다. 강남역은 젊은 여성들이 자주 가는 보편적인 공간이다. 이들은 강남역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모임을 갖기도 한다.
가해자 남성은 살해 대상을 구체적인 인격체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평소 혐오의 대상으로 그리던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고, 그가 이미지화한 ‘여성’들이 많이 갈 만한 곳으로 강남역을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 여혐의 대상이 되는) ‘소비지향적인 20대 여성’이라고 하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이런 공간에서 여성혐오의 아주 끔찍하고 극단적인 형태의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동시대 살고 있는 20대 여성들 모두에게 공포심을 가져왔을 거라고 본다.”
한국 사회 여혐 현상의 연장선상
-최근 논란이 된 온라인에서의 여혐 현상을 둘러싼 논란과 이번 사건이 어떤 연관성이 있나
“지난해부터 데이트 폭력과 관련해 목소리를 내는 온라인 페미니즘 움직임이 있었다. 이후 개별적인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한편 일부 남성들 입장에서는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전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내는 여성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개인적으로 없다고 느끼거나, 이들에게 ‘루저’로 취급받는다고 느끼며 여성 혐오가 점점 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일상에서 개별적으로 만나는 여성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 ‘혐오할 만한’ 익명의 여성을 찾는 거다. 이 부분에서 이번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고 본다.”
‘묻지마 살인’ ‘우발적 살인’ 서술에 대한 분노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라고 보도하는 것에도 여성들의 반발이 컸다.
“이번 사건을 ‘묻지마 살인’ ‘우발적 살인’이라고 보도하는 것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것이 계획적인 여성혐오 살인이라는 것이 거의 명백하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이나 네덜란드에서도 여성 권리운동이 벌어지고 여성권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살인사건들이 발생했다. 여성 권리가 올라가면 개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면 일부 남성들이 여성권의 향상이 (자신이 처한)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명백한 젠더 충돌이 계속 쌓이는 상태에서 터진 사건이며 20대 여성이란 특정 타깃에 대한 혐오에서 불거진 것인데, 언론에서는 애초 ‘묻지마 살인’이라고 서술했다. ‘묻지마’라고 쓴 이유는 (진짜 원인을) 언론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해자가 경찰에서 범죄 이유를 밝힐 때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에게 이해 받을 만하겠다’고 여기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인다. 범죄의 이유로 그런 말(‘여성이 나를 무시해서 살해했다’)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지금 여기가 여자들이 미워서 죽였다는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는 거다. 그게 진짜로 무서운 거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어떤 대응 방향을 모색해야 하나
“사실 나는 여성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서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좀더 떠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가해자의 목소리를 반복, 재생산할 뿐이다. 언론에게 “제대로 보도를 하라”거나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 거냐, 왜 가해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쓰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태도를 국가기관부터 언론까지 취해야 한다. 이 사건을 단지 젊은 여성들이 분노해서 시위하는, 젠더 대립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해자의 언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그 방향이 아니다” “이건 사고고, 우리는 이걸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젊은 여성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언론과 정부가 줘야 한다.
이 문제를 선정적으로만, 젠더 갈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만 본다면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이 타깃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더 가지게 될 것이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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