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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외골수 좌파 감독, 칸을 매혹하다

입력
2016.05.2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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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이 제69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나, 대니얼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칸=UPI 연합뉴스
켄 로치 감독이 제69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나, 대니얼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칸=UPI 연합뉴스

독설가다. 그의 까다로운 원칙과 견고한 이념에 걸리면 누구든 예외 없다. 날카로운 비판을 오래도록 쏟아 붓는다. 무차별적 비난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돈까지 벌어들이는 인기영합주의 독설가는 아니다. 그의 독설은 조금 불편해도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다. 그의 이상주의적 순정과 온정 어린 독설에 관객들의 마음은 곧잘 허물어진다. 영국 좌파 감독 켄 로치(80)는 스크린 안팎의 행보가 일치하는, 흔치 않은 세계적 영화 대가다.

22일 오후(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69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시상식에서 로치 감독이 ‘나, 대니얼 블레이크’로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생애 두 번째로 안았다.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같은 상을 받은 지 10년 만이다. 영화에서도 이념에서도 외골수로 살아온 로치 감독의 삶은 세인을 매혹시킬 만하다.

노동자의 삶에 천착한 법학 전공자

켄 로치 감독은 '루트 아이리쉬'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비판했다.
켄 로치 감독은 '루트 아이리쉬'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비판했다.

옥스포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로치는 노동자들과 빈곤층의 삶을 화면에 담아왔다. 방송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이력을 시작했고, 1969년 영화 ‘케스’로 영화감독으로서 주목 받았다.

그는 노동자들과 빈곤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삶을 사실주의 화법으로 다채롭게 묘사해왔다. ‘랜드 앤 프리덤’(1995)은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 노동자들의 낭만적 연대기를 되짚는다. ‘빵과 장미’(2000)는 미국 이주노동자들의 불우한 삶에 가족 갈등을 얹으며 노동 착취와 가족 내 남녀평등 문제를 다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형제의 비극을 통해 아일랜드 내전의 참혹함을 그렸고, ‘루트 아이리쉬’(2011)는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사설 경호업체의 비인간적 면모를 고발한다. ‘나, 대니얼 블레이크’도 궤를 같이한다. 몸이 아파 의사의 권유로 일을 그만둔 목수가 취업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그린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관료제적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질타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사회적으로 딱딱한 소재를 스크린에 불러내왔지만 영화의 결까지 경직되진 않았다. ‘에릭을 찾아서’(2009)는 유머가 가득하다. 우울증에 빠진 우체부가 프로축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명 스타 에릭 칸토나와 대화하는 환영을 겪으며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칸토나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맨체스터에서만 흥행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는 청춘을 향한 따스한 시선으로 청년 실업문제를 전한다. 사고뭉치 청년백수들이 사회봉사 교육관에서 위스키를 접한 뒤 인생 방향을 새로 잡는 모습이 웃음과 함께 묘사된다. 로치가 은퇴작이 될 것이라 공언했던 ‘지미스홀’(2014)은 아일랜드 시골마을의 마을회관을 매개로 춤과 음악을 전달한다.

직선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연출법은 칸영화제의 사랑을 유난히 받았다. 13편이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5번을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거침 없는 정치 행보로도 눈길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대니얼 블레이크'.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대니얼 블레이크'.

사회적 약자와 사회 정의에 대한 로치의 신념은 스크린 밖에서도 이어져왔다. 1960년대 영국 노동당 당원이 된 그는 보수당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해왔다.

2013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숨졌을 때 로치의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 로치는 대처를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총리”라고 규정하고, 국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던 대처의 장례식을 “가장 싼 가격에 입찰하는 사람에게 맡기자”며 ‘민영화’를 주장했다. 대처가 총리 시절 밀어붙인 항공, 철도 등 민영화 작업이 대량 실업과 공동체 해체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삶을 악화시켰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냉소 가득한 주장이었다. 로치는 노동당이 90년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제3의 길’을 선택하자 탈당한 뒤 노동당을 향해서도 “대처는 거리의 악사였고, 토니 블레어는 (춤추는) 원숭이였다”는 식의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비판으로도 유명하다. 로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폭력적으로 억압한다며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을 주도해왔다.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인 2008년 “60주년을 축하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 무덤 위에서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공동성명을 세계 문화예술인들과 내기도 했다.

최근 국제 정세를 비춰봤을 때 로치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상징적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등 극우 정치인들이 대중의 분노와 상실감을 양분 삼아 부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칸영화제의 경고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로치의 수상 소감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절망이 존재할 때 극우주의자들이 이익을 얻습니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라고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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