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25일 경기 양주시 황방리에 문을 연 독립운동가 조소앙(본명 조용은·1887∼1958) 선생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 축사를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연합국의 도움으로 1948년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의 노예들이 교과서를 다시 쓰려 한다”며 현 정부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전 원장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회장으로 개관식에 참석했다. 이 전 원장은 또 “나라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일부 사람들까지 우리 조국은 일본에게 패망하여 완전히 없어졌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연합국의 도움으로 1948년 비로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조소앙 선생께서는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도모한 혁명가이시고, 일관되게 삼균주의를 주창하신 정치사상가시며, 세계평화를 존중하는 외교가이시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드신 선각자”라며 “우리의 독립투쟁과정에서 여러 차례 대외 선언서가 있었습니다만 어느 것 하나 선생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추모했다.
이날 문을 연 기념관은 388㎡ 규모의 한옥 건물로,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낸 남면 황방리 1만㎡ 기념공원 내에 82㎡ 규모의 본가 건물과 함께 지어졌다. 기념관에는 일기, 임시정부 때 임명장 등 선생의 유품과 기록물 3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조소앙 선생은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임시정부 승인을 얻었다. 또 김구·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분을 수습하는 데 힘썼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다.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조소앙 기념관 개관 축사 전문]
오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원훈이신 조소앙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 양주시 남면 황방리 기슭에 기념관을 세우게 된데 대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시 모든 분들과 함께 마음으로 뜨겁게 축하하는 바입니다.
그간 기념관을 건립되기까지 수고하신 양주시장과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삼균학회 조만제 선생 및 여러분들께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아다시피 선생께서는 한때 단정수립이 민족의 영구분단을 초래하게 된다는 양심적 민족주의 길을 택하여 한 때 남북협상에 나서셨지만 곧 북의 실체를 직접 목도하고 노선을 수정하여 제2대 국회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시어 엄청난 탄압 속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셨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으로 선생께서는 또 다시 정치적 수난을 당하시었고, 끝내 납북되어 불행한 마지막 생애를 보내셨지만 선생은 일관되게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냉전시대에는 선생에 대한 추모의 모임조차 갖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난 84년 선생에 대하여 처음 추모제를 갖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제가 추모사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도모한 혁명가이시고, 일관되게 삼균주의를 주창하신 정치사상가시며, 세계평화를 존중하는 외교가이시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드신 선각자라고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투쟁과정에서 여러 차례 대외 선언서가 있었습니다만 어느 것 하나 선생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선생께서는 해박하셨고, 분명한 나라의 장래를 내다보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만든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으로부터 1919년 대한독립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과 건국강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선생의 철학과 방략이 담긴 문서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문서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선생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절의 역사로 보지 않았다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동단결선언에서 “융희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29일은 즉 우리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이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1910년 8월29일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 아니라 임금의 나라가 백성의 나라로 바꿔진 혁명의 날”이라는 역사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견해인 것입니다. 선생의 이런 역사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0년 9월17일 중국 중칭(重慶)에서 광복군이 성립되던 날, 임정 외교부장인 선생은 경과보고에서 “정미년(1907년) 8월1일 국방군 해산하든 날이 곧 광복군 창립된 날”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제가 비록 강제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지만 곧 이어 군의 장병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투쟁이 일어났고, 의병이 독립군으로 발전되었으며 독립군이 광복군으로 계승되었다는 역사인식, 이런 단절 없는 역사인식이 선생의 일관된 역사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모두가 단절된 역사관으로 가득 차 있고 걸핏하면 나라가 빼앗긴 것을 마치 민족이 열등하거나 퇴영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학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일부사람들까지 우리 조국은 일본에게 패망하여 완전히 없어졌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연합국의 도움으로 1948년 비로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의 노예들이 교과서를 다시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선생은 중국의 망명시기에 계속하여 임시정부를 지켜왔습니다.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외교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도 했고, 실지가 회복되면 이를 위한 준비도 했습니다.
이런 임정의 노력으로 1943년 11월 연합국의 영수들이 카이로 선언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 독립을 약속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아직도 식민사관에 찌들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척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카이로 선언에서 당시 인도, 아일랜드, 베트남...등등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상태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에 따라 독립을 보장한다고 영합국의 영수들이 합의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인도 독립운동의 영웅 네루는 “한국이 부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대한민국의 박물관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임시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여 광복회로부터 경고를 받아 사과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셋째, 선생의 국가 경영의 철학이 임시정부의 헌장에 반영되었고, 건국강령의 중요한 골자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현행 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면 시간을 내서 우리 헌법과 임시정부 헌장 그리고 건국강령을 비교하여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각 정당에서는 다투어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경제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는 바로 선생의 삼균주의를 이해하면 곧 해답이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곳에 조소앙기념관을 세우게 되어 늦게나마 제가 축하를 드리는 까닭은 앞에서 말한 것들이 앞으로 이 기념관에서 더 깊이 있게 연구를 해야 할 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이제 60년이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모두들 시대의 선각자이신 조소앙선생의 위대한 발자취를 찾아서 나서면 이것이 곧 분단된 우리나라, 동아시아의 화약고 같은 우리나라, 경제는 발전되었지만 아직도 암초에 걸린 것 같은 위기의 우리나라의 올바른 발전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조소앙선생의 영전에 예를 올리면서
여러분 모두 건안하시고 하시는 일이 성공되기를 기원합니다.
대한민국 97년 5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회장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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