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뉴욕타임스는 베트남전 그린베레 출신의 한 이름 없는 반전ㆍ인권운동가(Donald Duncan)의 부고를 숨진 지 7년이나 지난 뒤에 썼고, 부고 담당데스크는 그 기사가 늦은 사연을 설명하는 장문의 글을 다시 보름 여 뒤에 올렸다. 오늘의 미국이 지향하는, 혹은 모든 미국 시민과 세계인이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에 대한 언론의 경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가 그렇게 집요하다.
이번 주 ‘가만한 당신’의 주인공은 반전 보습운동(일명 쟁기날운동ㆍ Ploughshares Movement)을 최초로 시작한 미국의 형제 신부 대니얼과 필립 베리건이다. 60,70년대의 반전운동가들을 언급할 때면, 위 기사가 그랬듯, 존 바에스(가수)나 제인 폰다(배우) 노먼 메일러(작가) 같은 유명인들의 이름을 이끄는 게 그들, ‘못 말리는’ 형제다.
북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베트콩)의 68년 1월 30일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는 전쟁과 반전운동 모두의 분수령이었다. 미군 피해도 피해지만, 폭격과 살육으로 이어진 무차별 보복 양상은 미국의 정의를 의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보스턴대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과 예수회 소속 코넬대 신학자 대니얼 베리건(Daniel J. Berrigan)이 베트남을 방문, 인민군에 억류된 전투기 조종사 3명의 석방 협상을 벌인 게 그 무렵이었다. 2월 초 그들은 포로 3명과 함께 무사히 귀국했다. 가족과 함께 구정을 맞으라는 인민군의 인도주의적 조치, 라기보다는 반전 심리전의 회심의 한 수였을 것이다. 당연히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물론 미국 정부에겐 이적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대니얼보다 더 유명했던 건 두 살 터울의 동생 필립(Philip)이었다. 요셉파 신부인 그는 67년 10월 활동가 세 명과 함께 볼티모어 세관 내 징병사무소에 들어가 징병 서류에 피를 섞은 붉은 물감을 쏟아 부어 미국 신부로는 최초로 ‘반정부 활동’ 혐의로 기소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 당한 지 한 달여 뒤인 68년 5월, 재판을 받고 있던 필립이 형 대니얼의 코넬대 연구실로 찾아왔다. 볼티모어에서 한 것과 같은 일을 다시 벌일 참이니 형도 동참하라는 거였다. 2006년 ‘Demcracy Now!’ 인터뷰에서 대니얼은 “동생의 그 용기, 아니 ‘무대뽀(effrontery)’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뒤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해야 할 이유와 안 해야 할 이유를 혼자 찬찬히 적어봤죠. 그 초대에 응해야 할 이유가 압도적으로 많더군요. 그래서 했죠.”
훗날 ‘카튼스빌 9’이라 불린 그들 형제 신부와 활동가 7명은 68년 5월 17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외곽 카튼스빌(Catonsvlle) 징병사무소에 들어가 징병관 눈 앞에서 징병 서류를 몽땅(387건) 들고 나와 주차장에서 불 태운 뒤 이런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국가의 범죄행위를 마주하고도 침묵과 비겁함으로 일관하는 미국의 가톨릭 교회와 여타 기독교 기관들과 유대교회를 눈 앞에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관료적 종교기구들이 인종차별적이며, 이 전쟁의 공범이며, 가난한 자들에 냉담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행동하는 양심’ 박현주 지음, 검둥소)
미리 귀띔 받은 기자들은 사제복 차림의 형제- 왜소하고 금욕적 용모의 대니얼과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얼굴의 필립- 사진과 함께 그 소식을 미국 전역에 전했다. 두 사건은 행진과 거리 시위에 머물던 반전운동을 영장 소각 등 직접 행동ㆍ시민불복종 운동으로 확산시킨 분수령이었다.(The Nation, 2008.5.20)
형제는 공공기물 손괴와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지만, “불의의 판결에 순응할 수 없어” 형 집행 직전 잠적, FBI의 추적을 받아가며 활동을 지속했다. 수배 중 대니얼은 코넬대 학내 문화행사에 참여했다가 프로그램에 있던 ‘최후의 만찬’연극 배우로 분장해 문 앞을 지키고 섰던 FBI 체포조를 따돌리기도 했다. 그 무렵 필립은 가톨릭 인권운동 단체에서 만난 수녀 엘리자베스 맥알리스터(Elizabeth McAlister)와 연애 중이었는데, 먼저 체포된 그가 연인과 주고받던 편지에 형의 소재를 적는 바람에 대니얼도 체포됐다. 2년 뒤인 72년 가석방된 대니얼은 재판 과정을 희곡 ‘The Trial of the Catonsville Nine’으로 썼다. “선한 벗들에게 사죄하련다. 아이들을 대신해 종이조각을 태운 죄, 그래서 납골당 행렬의 질서를 흩뜨린 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이여 저희를 도우소서”(WP, 2016.4.30)
형제는 미네소타 주 버지니아 시의 한 독일 이민자 가정의 6남매 중 넷째와 막내로 1921년 5월 9일, 23년 10월 5일 태어났다.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노조 활동을 하다 해직되면서 가족은 시라큐스로 이주했다. 뉴욕타임스는 대니얼의 자서전 ‘To Dwell in Peace’(89)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그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병약했고, 특히 발목이 약해 4살 때까지 잘 걷지도 못했다는 이야기, 자연스레 엄마와 보낸 시간이 길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하는 폭력을 자주 목격했다는 이야기. 아버지는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면서 그 분노를 집안에서 풀곤 했고, 아버지의 그런 죄를 사해주는 교회가 못마땅했다는 이야기. 그는 신학교(뉴욕 하이드파크 예수회 신학교와 볼티모어 우드스탁 칼리지)에 진학, 5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동생 필립은 고교 졸업 후 세미프로 야구팀 선수로 뛸 만큼 활동적이었다. 43년 입대 후 극심한 흑인 차별과 유럽 전선의 참상을 겪고는 그 분노와 죄의식으로 신학교(매사추세츠 우스터 홀리크로스 칼리지, 뉴올리언스 로욜라대와 세비어대)에 진학, 55년 사제가 됐다. 전쟁 기간 ‘선은 반드시 악을 이긴다’는 국가주의자들의 선전에 담긴 위선을 냉소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의 선은 ‘유러피언 백인’의 선일 뿐이었다.(NYT, 2002.12.8)
50년대의 대니얼은 신학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문학, 특히 시를 썼다. 미국시인아카데미(AAP)의 ‘제임스 로린상(James Laughlin Award)’을 받은 58년의 첫 시집 ‘무한한 시간 Time Without Number’을 비롯, 그는 평생 50여 권의 책(시집 15권)을 썼다. 훗날 그는 좌파 사회운동가이자 가톨릭 평화주의자로 ‘가톨릭노동자운동(CWM)’을 조직한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에게서 비참과 가난, 전쟁의 방정식을 바라보는 신학자의 관점을 배웠고,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작가 토머스 머튼(1915~1968)에게서 문학과 좌파신학자로서의 헌신과 용기를 배웠다고 말했다.(‘The Nation’위 기사) 그는 코넬대 안식년이던 63년 프랑스 파리 르무안(LeMoyne) 칼리지에서 현지 신부들로부터 인도차이나의 현실을 알게 됐고, 돌아오자마자 동생과 함께 ‘가톨릭 평화형제회(CPF)’를 조직, 반전운동을 시작했다.(AP, 2016.5.1) 67년 10월 펜타곤 앞 시위로 2주간 워싱턴D.C 감옥에 갇혔던 게 그의 첫 전과였다.
60,70년대 미국 사회는 흑인 등 소수자 인권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입장으로 크게 양분돼 있었다. 형제를 세상 모르고 이적행위나 일삼는 철 없는 영웅주의자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로서도 그들은 눈엣가시였다. 가톨릭주교단은 65년 말 가톨릭노동자운동 소속 청년 로저 라포르테(Roger LaPorte, 1943~1965)가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분신한 직ㆍ간접적 책임을 물어 대니얼을 남미로 사실상 추방했다. 현지 교회 사정을 살펴 보고하라는 게 임무였지만, 대니얼에게는 남미의 정치ㆍ사회 현실과 미국의 역할, 교회의 역할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계기, 전의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부자들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가톨릭교회의 현실, 극우 군사정권에 무기를 대는 미국 군사정책의 실상을 보았다.(WP) 그의 추방에 항의하는 자유주의 가톨릭 진영과 시민들의 압력에 굴복해 주교단이 그를 뉴욕으로 다시 불러 들인 건 약 5개월 뒤였다. 펜타곤 시위와 카튼스빌 사건 등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훗날 대니얼은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두고 “가톨릭교회에 소비에트식 통치 기법- 밀고와 추방, 사찰과 내사 등-을 도입한 인물이었다”며 “그의 유산을 극복하려면 최소 한 세대는 지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2008년 인터뷰)
필립은 72년 12월 가석방된 뒤 이듬해 맥알리스트와 결혼, 볼티모어에 정착해 저 유명한 ‘요나하우스 jonah house’를 건설했다. 비폭력 저항의 공동체인 요나하우스는 96년 성 피터 공동묘지 내로 터전을 옮겨 농장을 일구며 반전 인권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80년 9월 8일, 펜실베니아 킹오브프러시아의 제너럴일렉트릭 군수공장에 들어가 핵미사일 ‘마크 12A’의 탄두 부품 노즈콘을 망치로 부수는, 최초의 ‘반핵 러다이트’(보습운동)를 이끈 것도 신부 대니얼과 전 신부 필립이었다.
2006년 인터뷰에서 대니얼은 “무기에 대한 최초의 타격이었어요.(…) 현지에 도착한 우리는 부품이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몰랐는데, 교대조가 드나드는 공장으로 무작정 들어갔더니 그게 있더군요. (…부품을 부순 뒤) 준비해 간 돼지 피를 뿌리고 빙 둘러서서 기도를 했죠.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장 4절, 성서공회 개정개역판)
재판에서 판사가 ‘이후로는 그런 행위를 삼가겠냐’고 묻자 대니얼은 타당한 질문은 그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재판장님께서는 부시 대통령에게 미사일 만드는 걸 중단할 것인지 먼저 질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3~10년 형을 선고 받았지만, 10년간 이어진 상소와 항고 끝에 재판 기간을 수형 기간으로 인정받아(time-served) 실형을 살지는 않았다. 그 피고들 중에 훗날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출연한 배우 겸 평화운동가 마틴 신(Martin Sheenㆍ 1940~, ‘플래툰’의 주연 찰리 신의 아버지)도 있었다. 에밀 드 안토니오(Emile de Antonio,1919~1989) 감독의 82년 영화 ‘In the King of Prussia’은 그들이 직접 연기한 그들의 이야기였다. 대니얼은 “마틴 신은 재판장 역이었는데, 필립과 나는 그에게 연기가 별로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충분히 사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필립은 이후로도 활동을 지속하며 1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2002년 12월 6일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독립영화 감독 린 삭스(Lynne Sachs)가 카튼스빌 사건을 소재로 2001년 다큐멘터리 ‘Investigation of a Flame’(2001)을 제작해 그 해 5월 메릴랜드 필름페스티벌에서 시사회를 열던 무렵 77세의 필립은 다른 시위 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아내 맥알리스터는 “필립은 한결 같은 신앙인이었고, 변함없이 굳건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2년 12월 6일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대니얼은 뉴욕 시라큐스의 르모인칼리지와 뉴올리언스 로욜라대, UC버클리와 시카고 드폴대 등서도 교편을 잡았다. 동생과 함께 AIDS환자 돕기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고, 2012년 맨해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에도 동참했다. 카튼스빌 사건 40주년이던 2008년 ‘The Nation’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이 내 생애 최악의 시기”라고 “지금처럼 미래가 안 보이던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 해 전 보스턴칼리지가 이라크 침공의 매파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한 일, 대테러 전쟁의 선봉 마이클 무카시 검찰총장의 로스쿨 강연 등을 꼬집어 비난했다. “그들의 남루한 삶(shabby lives)이 모범이 되고 영예로운 일이 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삶의 원칙은 돈과 직장생활의 매트릭스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영적 기반 없는 사회운동, 특히 감정에 치우쳐 금세 폭발하고 꺼져버리는(short fuse) 좌파 운동의 짧은 주기를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잃었을 뿐, 모든 걸 잃지는 않았다”고, “40주년을 기념하는 까닭도 지금 우리가 여기,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은, 뭔가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선이기에 좇을 가치가 있다.(…) 성경이 선의 결실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믿는 바 선을 능력껏, 조심스럽게, 비폭력적으로 실천하는 것에만 마음을 썼고,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그는 심혈관 질환으로 4월 30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Democracy Now!’는 부고 기사에서 조지타운대 신학대학장 체스터 질리스(Chester Gillis)의 말을 인용했다. “20세기의 가톨릭 선지자를 찾고자 한다면, 도로시 데이나 토머스 머튼과 함께 있을 베리건 신부를 찾으면 된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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