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제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여성감독 김재의가 발표한 ‘꿈’은 1955년에 발표된 박남옥 감독의 영화 ‘미망인’의 주요 장면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딸 이경주와 함께 노년을 보내고 있던 박남옥의 일상을 함께 펼쳐 보인다. 출산 직후 카메라 뒤에 서려 했던 시도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회고하는 박남옥의 목소리는 흑백 화면을 뚫고 총천연색의 ‘꿈’으로 현현했다.
박남옥의 꿈은 한 명의 여배우에서 시작됐다. 바로 김신재였다. 닥치는 대로 책을 독파하던 어린 시절 ‘신영화’라는 일본 영화잡지를 통해 최인규 감독의 부인이자 배우였던 김신재에 관한 언급을 발견했다. 그 글을 접한 이후 박남옥은 김신재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어 그의 출연작 스틸을 모조리 스크랩했고, 편지까지 수십 통 써 보냈다고 전해진다.
S#1 영화의 꿈 혹은 ‘김신재’라는 이상형
김신재는 문예봉, 김소영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 트로이카 가운데 한 명이었다. 조선 대표 현모양처 문예봉, 담배 연기와 한탄이 어울린다는 김소영에 비해 김신재는 ‘만년 소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신의주 신연극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 극장 영사기사였던 최인규와 결혼한 김신재는 남편을 따라 영화계에 입문하여 짧은 기간에 스타덤에 오르며 일본 신파극의 대배우 미즈타니 야에코(水谷八重子)에 비견되었다. 김신재는 남편의 영화 대부분에서 군인이 될 조선 소년들 곁을 지키는 ‘조선의 누이’였다. 여배우들과 남편 사이에서 불거진 스캔들을 감내하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 또한 가지게 되었다. 미즈타니의 신파성이 김신재의 연기가 아닌 삶 그 자체에 유착되었던 셈이다.
훗날 박남옥이 김신재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함께 작업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박남옥이 김신재로부터 발견한 미감은 ‘만년 소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인규와의 동지 관계를 유지한 예술가로서 화면 안팎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비로소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신재에 대한 박남옥의 찬미는 팬덤의 소비가 아니라 영화 미학이라는 생산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미학은 또 한 명의 여성, 레니 리펜슈탈과의 만남을 통해 그 절정에 도달했다.
S#2 전범(典範/戰犯) 레니 리펜슈탈과 ‘올림피아’
베르타 헬레네 아말리에 레니 리펜슈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923년, 무용가로 데뷔한 리펜슈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 부상으로 무용가의 길을 일찍 마감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산악영화 ‘운명의 산’의 포스터를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된 그녀는 폰 아르놀트 팡크 감독과 함께 산악영화 ‘성스러운 산’의 제작에 뛰어든다. 여주인공은 미모는 물론, 강인한 육체까지 지닌 리펜슈탈, 바로 그녀였다.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고 열렬한 팬이 된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1932년 리펜슈탈의 영화 ‘푸른 빛’을 본 히틀러는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고, 그녀는 정치의 미학화에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제공했다. 1935년 히틀러의 요청으로 리펜슈탈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영화 ‘의지의 승리’는 혁신적인 스펙터클과 적절한 사운드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그녀는 히틀러를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구세주처럼 묘사해낸다.
이듬해 리펜슈탈은 국제올림픽위원회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만들게 되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쥠과 동시에 ‘나치의 마녀’라는 닉네임을 얻는다. 인간 육체의 미적 가치를 집요하게 추구한 것으로 평가 받는 ‘올림피아’에서 리펜슈탈은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를 비중 있게 다루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식민지 조선의 손기정이었다. 강인한 육체의 웅대한 드라마가 여성감독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남옥은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박남옥은 손기정과 손기정의 창조자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리펜슈탈을 통해 자신의 강인한 육체를 다시 한 번 상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S#3 전선(戰線)에 선 ‘강인한 육체’의 여성
“호탕하고 보기 드문 술고래로 함께 영화 이야기로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영화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유현목의 회고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박남옥에게서 통념적인 여성상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박남옥 감독은 소주 두세 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박남옥의 이력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경북여고 재학시절 투포환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현 전국체전)에 출전해 1939년에서 1941년까지 3회 연속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육상인들이 ‘해방 후에는 백옥자, 해방 전에는 박남옥’이라 평가할 정도의 뛰어난 성과였다. 박남옥은 투포환뿐만 아니라 단거리와 높이뛰기에도 재능을 보인 만능선수였다.
1943년 박남옥은 부모 권유로 이화여전 가정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인 1944년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 맞서 학교를 중퇴하고 의절하다시피 한 채 대구 일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여 영화평을 집필했다. 1945년부터는 서울로 올라와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조수 및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현장 경험을 쌓게 된다. 1950년 초여름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한국전쟁을 겪게 된 박남옥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와 결혼한 것은 1953년 부산에서였다. 그리고 첫 딸 경주를 얻었다.
첫 딸 경주에 뒤이어 탄생한 것은 ‘한국영화사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었다. 박남옥의 데뷔작 ‘미망인’은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언니의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영화로서, 낳은 지 겨우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 업고 찍은 작품이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큐 사인’을 외쳤을 그녀의 존재는 리펜슈탈이 스크린을 통해 욕망하였던 강인한 육체, 바로 그것이었다. 1955년 4월 2일,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영화 ‘미망인’의 개봉은 박남옥의 ‘미망(彌望)’과 더불어 강인한 육체의 여성에 의해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S#4 영화 ‘미망인’과 박남옥의 전후(戰後)
박남옥의 ‘미망인’은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어 불과 나흘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박남옥은 영화잡지 ‘시네마팬’을 창간하면서 해외영화제를 취재하여 소개하는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을 이어가 보지만 더 이상 연출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이로써 ‘미망인’은 데뷔작이자 은퇴작이 됐다. 하지만 ‘미망인’은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됨으로써 재발견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 때 죽은 남편의 친구에게 후원을 받아 삶을 유지하면서 딸을 버리고 또 다른 남자와의 동거를 시작하지만, 끝내 그에게 배신당하고 마는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다. 사실 ‘미망인’의 미학적 성취는 그리 괄목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대한 환멸과 선택에 대한 자신감에 기반한 영화 ‘미망인’의 내러티브는 박남옥의 시대인식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싱가미싱’의 박동 속에서 힘겨운 삶을 위태롭게 유지해나갔던 전쟁 미망인들의 삶을 뒤로 하고,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촬영현장을 누비던 박남옥의 1950년대는 전후 여성이라는 전형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미망인’의 내러티브를 이미 초월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S#5 독학자의 서재는 서재 바깥의 현장
박남옥의 독학은 의식과 무의식,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영화가 바로 의식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삶이 무의식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박남옥의 독학은 훌륭한 개념과 이론이 제공하는 확실한 지침 대신 공식적인 말과 글의 칸막이를 벗어난 예술적, 육체적 모험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말과 글의 칸막이를 넘는 일이 가정이라는 규율적 공간의 울타리를 넘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2008년 제1회 박남옥 영화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러한 모험의 재현으로서 리펜슈탈을 거쳐 박남옥이 꿈꾸었던 강인한 육체의 향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의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라고 말한다. 단 한 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있지만, 독학자로서 박남옥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여성영화의 마르지 않는 생명력으로서 박남옥은 독학을 통해 자신을 낳은 첫 번째 여성으로서 정당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권두현 동국대ㆍ동아방송예술대 강사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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