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ㆍ생일 케이트 등 올려놓고
사회초년생 안타까운 죽음 애도
추모 문구 포스트잇 벽면 가득
“책임감 있고 정직하게 살라고
아들에 말해 후회” 어머니 오열
“다음 세상에는 돈보다 사람이 귀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31일 서울 광진구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을 찾은 윤재훈(19)군은 대합실 한 켠에 마련된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내 한 글자씩 꾹꾹 눌러썼다. 인근 대학을 다니는 윤군은 지난달 28일 숨진 정비외주업체 직원 김모(19)군과 같은 나이다. 몇 년 뒤 취업을 앞둔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윤군은 “인력을 줄여 비용을 아끼겠다는 어른들의 탐욕에 아직 꿈도 채 펼치지 못한 동갑내기 친구가 희생됐다”고 말했다.
스크린도어(안전문) 수리작업 도중 사망한 서울메트로 외주 정비업체 은성PSD 직원 김군을 기리는 추모 물결이 번지고 있다. 사고 현장에는 사회초년생 어린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고 발생 장소인 구의역 9-4 승강장 안전문과 역사 내 1ㆍ4번 출구 쪽 대합실에는 추모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는 국화 수십 송이도 놓였다. 김군 가방에서 뜯지 않은 컵라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부 시민들은 컵라면을 들고 왔고, ‘더 맛있는걸 드시라’는 글과 함께 즉석 밥과 미역국을 두고 가기도 했다. 사고 이튿날이 생일이었던 김군을 위한 케이크도 마련됐다. 케이크 상자에는 “취업준비생 남동생을 둔 누나로서 슬프고 안타깝다”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더 잘해주지 못해 가슴 아프다’ ‘항상 보고 싶을 거다. 사랑한다’ 등 전날 김군 친구들이 붙여둔 글도 추모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번 사고가 외주화와 재하청 등 구조적 문제가 빚은 참사라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한 시민은 ‘예고된 인재(人災)였다. 서울시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남겼다. 페이스북에도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이라는 추모 페이지가 만들어지는 등 온라인상에서도 추모 열기가 이어졌다.
이날 오전 민주노총 등 20여개 단체가 주최한 구의역 기자회견에는 김군 어머니 이모(43)씨가 검은색 상복을 입고 나와 아들의 죽음에 분개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가 온몸이 부서져 피투성이로 안치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죽은 아들은 20년 키운 어미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입을 뗀 그는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며 배운 대로 그리고 시킨 대로 일한 것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이어 “우리 사회가 책임감 강하고 지시 잘 따르는 사람에게 남긴 것은 죽음뿐인데 왜 아들에게 책임감 있고 정직하게 살라고 했는지 그게 가슴을 찢어놓는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미칠 듯이 후회된다”며 오열했다. 이씨는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간 15분간 수 차례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쏟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다른 유가족 등에 업힌 채 자리를 떠났다.
더불어민주당, 새누리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여야 4당 지도부도 이날 사고 현장을 잇따라 방문해 서울시와 서울메트로를 질타했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사람 잃고 대책 마련하는 방식을 버려야’라는 포스트잇을 추모 공간에 남겼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에 할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8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발생한 외주업체 정비직원 조모(29)씨의 사망 사고를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사고에 연루된 서울메트로 임원급 관계자와 외주업체 임원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당시 숨진 조씨도 김군처럼 혼자 승강장에서 작업을 하다 희생됐다. 경찰 관계자는 “입건된 관계자들 중 검찰에 송치할 대상을 최종 검토하는 단계에 있다”며 “내주쯤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넘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